로고

봄은 솜이불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3/27 [12:42]

봄은 솜이불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3/27 [12:42]

봄은 솜이불

 

이덕대

 

 

 가을 산이 만산홍엽이라면 잎과 꽃이 어우러진 봄 산은 갓 시집온 새색시의 양단 공단으로 멋 부린 차렵이불이다. 하늘을 향해 부풀어 오른 이 계곡 저 능선은 부드러운 융단을 깐 듯 둥글고 우아하다. 햇살을 담아 핀 산벚은 은은하고 참꽃은 화사하다.

 생강나무와 산수유꽃은 노랗고 무리 지어 핀 제비꽃이나 현호색꽃은 신비로운 자색이다. 산 꽃들은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다. 파스텔을 칠한 듯 부드럽고 온화한 봄 색깔은 말할 수 없는 생명의 경이를 느끼게 한다. 봄이 주는 축복이다.

 

 봄볕이 따스한 날이면 할머니는 겨우내 손주들이 덮었던 솜이불 홑청을 뜯어내고 솜을 간짓대에 걸어 말렸다. 해거름이 되기 전 작대기로 몇 번 털고 묶어 두었다가 읍내 장터머리 만수 솜틀집에서 터서 새 솜처럼 만드셨다. 읍내에 나들이 갔다 온 솜은 다시 부등깃처럼 가볍고 따뜻했다.

 솜은 다시 생명을 얻었다. 솜이 만수네 가게를 다녀와야 비로소 봄이 제대로 왔다. 더 이상 꽃샘추위도 한기도 방문을 넘을 일이 없다는 확신이 섰을 때 솜 이불을 정리하셨음에 틀림없다.

 솜이불 홑청을 뜯고 털어 말리는 날은 따스한 봄볕이 마루 안쪽까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삼베를 날기 위해 북이라도 빌리러 온 마을 아낙들은 뜯어 놓은 솜을 만지며 ‘솜이 참 두툼하고 따습게 생겼다’는 말을 보탰다. 일 바쁜 시골에는 이웃 간 정 붙는 말도 한가한 봄날에나 어울렸다.

 솜이불만 펼치면 구수한 솔가지 타는 냄새와 매캐한 청솔 연기가 함께 이야기를 끌고 왔다. 서로 이불을 많이 덮겠다고 발을 집어넣다 보니 이불은 공중에 뜨고 방구들은 쉽게 식었다. 할머니의 화나지 않은 호통 소리가 몸을 웅크리게 했고 그 호통이 오히려 부추김이 되어 더욱 이불을 서로 끌어당기며 발길질을 해댔다. 형제 많은 집 아이들은 얼추 그랬다.

 베개도 제대로 없는 잠자리였지만 두툼한 솜이불은 언제나 가슴을 제대로 눌러 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발이 서로 닿을 때마다 키득거리며 발길질을 해댄 탓에 자고 일어나 보면 무거운 솜이불은 윗목 구석으로 밀려 있기 일쑤였다.

 

 아이들이 물감을 마구 뿌린 듯 온 산이 화려한 봄이다. 봄 햇살은 겨우내 덮었던 솜이불을 말리고 틀어 계절의 변화를 방안에 끌어들이라고 한다.

 요즘 세상에 두꺼운 솜 이불을 덮고 사는 집은 없다. 뽀샤시한 극세사 재질에 알숨달숨 무늬의 홑청으로 만든 오리털이니 거위털이니 하는 가볍고 따뜻한 이불이 대세다. 가난이 물러가면서 이부자리도 바뀌었다.

 아무리 그래도 간짓대에서 따스한 봄 햇살이 스며들어 옷곳해진 목화 이불을 이길만한 것이 있을까. 건강을 위해서는 화학섬유보다 벙그러진 꽃봉오리 봄 햇살을 담은 무명 솜 이불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섬진강가 매화가 다 이울었다는 소식이니 곧 온 산야가 알록달록 차렵이불이겠다. 익은 봄은 향기를 품은 솜 이불이다.

 

 

 

본문이미지

▲이덕대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현재)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

한국수필 신인상(2021)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선정(2023)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출간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