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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배추가 있는 풍경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2/01 [14:56]

겨울배추가 있는 풍경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2/01 [14:56]

겨울 배추가 있는 풍경

이덕대

 

                                                          

 고향 걸음을 할 일이 있어서 간 김에 귀촌한 친구의 농막을 찾았다. 겨울 해는 짧았다. 서산마루에 조각달이 걸리자 골바람이 차다. 와룡산 민재봉 위로 구름이 몰려드나 싶더니 날리는 눈발과 함께 하늘이 아등그러진다.  

 만나자마자 머릿수건을 풀어 털며 봉지 커피를 준비하는 친구는 허공에 발이 뜨기라도 한 듯 부산하다. 철 이른 소소리바람이라도 부는지 울타리 겸 심어진 방아 마른 대궁 버석거리는 소리 들린다. 뭐가 그리 바쁘냐는 시선을 보내니 그제야 힘들게 허리를 펴며 웃는다. 그래도 손은 한 번 잡아보자 했다.

 겨울 땔감 준비하느라 그랬는지 작은 마당 여기저기 지저깨비다. 대나무 평상 위로 짙은 커피향이 푼푼히 번진다. 마신 잔을 넘겨받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요즘 툭바리식당에 물메기국이 제철이라 했다. 제철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의중을 못 들은 척 향로봉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잠깐 말을 나누는 사이 대밭 아래 자리한 농막은 금방 어둠이 내렸다. 검정색 부직포를 덧대어 달아낸 농막 처마 밑에서 작은 전등 하나가 몰려드는 어둠을 밀어 냈다. 불빛 너머의 산들은 흐릿한 으스름 달빛 아래 나부죽하다.

 벗은 무엇부터 할까 잠깐 머뭇거리는 눈치다. 선걸음에 갈 게 뻔한 친구와 이야기를 더 나눌지 손에 들려 보낼 물건부터 챙길지.

 지난여름 비 오는 날 찾았을 때 빈손으로 보내면서 마음이 편치 않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가지와 오이, 고추를 큰 비닐봉지 가득 따서 건네며 농약 덜 치고 키운 것들이라 도시 가게에서 파는 상품에 비해 볼품은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종이상자를 들고 농막 옆 텃밭으로 간다. 앞 들판은 겨울이 어슴푸레 누워있다. 옆 마을에서 개가 짖는다. 손전등 불빛 주위로 어둠이 밀려난다. 대밭에서 불빛에 놀란 산비둘기 날개 투덕거린다. 전등을 대신 들어준다.

 짚을 걷어내자 진잎으로 잔뜩 웅크린 배추가 잠을 자고 있다. 툭 소리가 들릴 정도로 뿌리에 칼질을 하더니 종이상자에 담는다. 겨울에 찾아오는 벗에게는 줄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린다.

 겨울 배추는 단맛이 난다며 겹겹이 두른 진잎을 떼어내고 여태 진초록 빛이 남아있는 속잎 하나를 건넨다. 입에 넣으니 서걱서걱한 무서리 맛에 청신한 가을 향이 느껴진다.

 단순히 혀가 느끼는 맛이 아니라 오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전신의 맛이자 고향의 맛이다.

 겨울 배추 몇 포기를 싣고 밤길을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흐뭇하다. 

 

 

 

 

 

▶이덕대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현재)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

한국수필 신인상(2021)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선정(2023)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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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닭 2024/02/01 [17:27] 수정 | 삭제
  • 아삭하고 노오란 속잎을 곰삭은 전어 젓갈에 꾹 찍어 갓 지은 햇쌀밥을 스스럼없는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재미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끝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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