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가 있는 오일장
이덕대
수로를 따라 늘어선 벚나무가 연초록 잎들로 풍성하다. 한창 바쁜 농번기이지만 서울에 인접한 이곳은 늦은 봄맞이 겸 장 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앞다투어 자란 모종이며 푸성귀들이 돈 사러 가는 시골 할머니들을 따라와 장터는 활기차다. 공영주차장을 비우고 서는 오일장은 사람 냄새가 푼푼해서 좋다. 새벽 장 준비하느라 피곤해서 그런지 물건을 잔뜩 널어놓고도 잠에 취한 장꾼이 안쓰럽다. 반드럽지 못한 시골 아낙이 터앝에서 길렀다며 집어주는 푸짐한 덤은 거래라기보다 인정이다. 뻥튀기 아저씨 옆에 메주 몇 덩이와 함께 펑퍼짐한 옹자배기에 된장을 파는 아주머니가 앉았다. 된장에 박아 둔 나무 주걱이 몽당 부지깽이 같다. 봄 날씨임에도 마디 굵은 손가락을 연신 치맛자락에 숨기며 오가는 사람 눈길에 자꾸 고개만 숙인다. 메주 한 짝에 만 원이라 적힌 종이를 붉은 벽돌로 눌러 놓았다. 메주 묶어 온 낡은 보따리에 목줄 걸린 강아지 차일 아래 볕뉘에 엎드려 졸음 삼매경이다. 앉은 자리조차 되알지지 못해 보이는 아주머니는 물건을 팔기보다 세상구경에 더 관심이 있나 보다.
메주 만드는 옛 풍경이 그려진다. 메주콩을 삶는 날은 어쩐지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메주를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 정성이 필요하다. 농사꾼 아낙의 한 해 농사 마무리는 메주 만드는 일이다. 가마니 가득 눌러 담아 갈무리해두었던 메주콩을 꺼내어 씻고 불리고 삶는 일은 완력보다는 정성이 더 들어간다. 묵혀 두었던 커다란 무쇠 가마솥을 여러 번 씻고 닦아낸 뒤 메주콩을 삶았다. 새벽부터 삶기 시작한 콩은 얼추 해가 중천에 이르러야 충분히 삶아졌다. 커다란 돌절구에 삶은 콩을 넣고 절구질을 하여 메주를 만든다. 손바닥에 콩 삶은 물을 적셔가며 적당히 문지르고 두드리면 메주 모양이 된다. 콩물을 반지르르하게 바른 무른 메주는 그늘에서 어느 정도 말려 굳어지면 볏짚으로 묶어 방안에 매달아 띄웠다. 메주 뜨는 방은 할머니 냄새가 났다. 그날 아이들은 괜히 신이 났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와서 앞집 옆집 함께 모여 콩 삶는 가마솥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들의 달음박질에 강아지도 덩달아 까닭 없이 달렸다. 먼지 일어난다고 할머니의 호통이 등짝으로 날아들었다. 고소하면서도 단맛이 도는 삶은 콩은 배고픈 아이들에게 자꾸만 손이 가는 유혹이자 특별한 별미였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의 메주 가격 묻는 소리에 퍼뜩 옛 생각에서 깨어났다. 도심의 아파트 생활에 메주는 화중지병(畵中之餠)이다. 사지도 않을 물건을 오래 보고 있었으니 열없다. 옹자배기에 담긴 된장을 국산이냐며 괜히 말을 붙인다. 들릴 듯 말 듯 한 대답과 함께 다짜고짜 된장 한 보시기를 비닐봉지에 담더니 봄볕에 검게 그을린 거친 손으로 된장을 건네준다. 곰삭은 된장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어릴 적 메주 추억이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장터 입구에 아낙이 팔고 있던 쑥이 갑자기 생각났다. 겨우내 생기 잃은 몸에는 움쑥 향 어우러진 된장국만 한 보약이 없다는 어른들 이야기가 떠오른다. 재래시장 시골 된장이 제대로 된 된장일 터다. 오늘 저녁은 쑥 넣은 된장국이나 끓여 달래야겠다. 뻥튀기 소리에 졸던 강아지 놀라 눈 휘둥그레진다.
▲이덕대 *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년~현재) *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년) * 한국수필 신인상(2021년) *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선”에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선정(2023년) *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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