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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사찰에서 만난 선덕여왕 / 박일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3/12/13 [13:55]

천 년 사찰에서 만난 선덕여왕 / 박일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3/12/13 [13:55]

  천 년 사찰에서 만난 선덕여왕 / 박일례

 

 

  떠남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다.

  천 년의 옛 도읍지가 또 천 년을 지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도시, 경주에 발을 디뎠다. 배꼽시계가 울려 신경주역 안에 있는 음식점을 찾았다. 벽에 붙은 차림표에 육부촌 육개장이 있어 신라인들의 잔치 초대에 한 상 대접받는 기분으로 맛나게 먹었다.

  숙소에 도착한 후, 가볍게 짐을 챙겨 다시 나왔다. 바로 앞이 황룡사지다. 신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영광의 사찰이 마법처럼 사라진 곳이다. 벌판에는 흙바람이 일고, 이름 없는 잡초가 덩그러니 놓인 돌들을 감싸주고 있었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으로 먼저 향했다. 문 안으로 들어서서 몸을 왼쪽으로 돌리자마자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입이 떡 벌어졌다. 황룡사 구 층 목탑을 재현한 모형탑을 보고 놀란 것이다. 8m. 실제 크기는 80m. 서울 롯데 타워가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살피며 모형탑을 한 바퀴 돌았다.

 

 

  최초 여왕으로서 간절함이 얼마나 컸을까?

  약 백 년에 걸쳐 황룡사 절이 완성된 날의 감회는 어떠했을까?

  목탑 양쪽에는 처마 끝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을 실제 크기로 재현해 놓은 공포가 있다. 주심포 목재 건축법이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부재로 쓰인 사람 인(人)자 모양의 나무 조각이 힘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이 층 고건축실 코너에서 동양 최대의 치미를 만났다. 새의 꽁지깃을 닮은 망새다. 여기에 새겨진 다정스러운 할머니 모습과 수염 달린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재미를 더했다. 신라 장인의 익살스러운 여유를 보았다.

  옆에는 구 층 목탑 심초석 아래에 넣어둔,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유물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도굴되었다가 회수된 것이다. 특히 사리 내함에 적힌 「찰주본기」가 돋보였다. 사리 내함 안팎 삼 면에 구 층 목탑의 이름과 중건, 수리 내력을 담은 기록이다. 구경하고 뒤로 물러나다 또 놀랐다. 내 키보다 큰 부처님 머리가 있었다. 장륙존상 나발의 파편이 발견되어 복원해 놓은 머리 부분이다. 장륙존상 전체 불상 크기는 상상만으로도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황룡사지 터만 보고 지나가면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벌판에 돌덩이가 흩어져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젠 그 빈터가 높은 목탑과 거대한 부처님과 금당이 있는 왕실 사찰로 머리에 그려졌다. 역사문화관을 지어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복제하고, 유적을 재현 전시해 준 덕분이다. 특히 구 층 목탑 실제크기로 복원된 난간에 서서 서라벌의 옛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재현해 놓은 곳에서는 잠시 신라인으로 돌아갔다. 실물이 아니라도 역사성을 갖춘 상징적인 건물이 주는 효과는 컸다.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 층으로 다시 내려와 카페 기념품 판매대에서 ‘신라의 미소’ 모형을 산 뒤, 밖으로 나왔다. 황룡사의 흔적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다. 구 층 목탑 심초석을 찾았다. 주변에는 많은 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심초석을 덮고 있는 암석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내 기분 탓인지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길을 다시 옮겼다. 금당지다. 석조대좌 세 개는 삼존상 흔적이다. 가운데 큰 것이 장륙존상이고, 좌우에 두 개가 문수, 보현보살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셋보다 작은 받침대가 좌우에 있다. 몽골군의 방화로 모두 녹아 없어졌다는데 그 많은 쇠가 흔적 없이 사라지기까지 고통의 시간을 짐작해 본다. 나는 장륙존상 대좌 뒤에서 소원 세 가지를 빌었다. 꼭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신라 최고 명당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걸어가는 곳곳이 다 유적지라 규모가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지 발걸음 자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황룡사 북쪽 길로 바로 이어지는 곳에 분황사가 있다. 분황사로 가는 길에 청보리밭 사이로 당간지주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분황사 당간지주다. 거북받침대 앞발이 하나만 남아있다. 세월이 데려갔나 보다. 

  ‘향기로운 임금님의 절 분황사’

  이름이 특이하다.

절 문을 들어서자, 경내가 무척 아담했다. 마당 가운데에 우뚝 선 벽돌탑을 만났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하나씩 쌓아 올렸다. 원래는 신라 역사상 가장 큰 약사불이 금당에 봉안되어 있을 정도로 큰 구 층 사찰이었다고 전한다.

  분황사 역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피해를 비껴갈 수 없었나보다. 그나마 지금까지 이어온 것은 나무도 쇠도 아닌 돌이기 때문이라고.

  1915년 분황사 모전석탑 수리 중에 발견된 사리장엄구 안에서 금, 은 바늘과 바늘통, 쪽가위, 은함 등 여성용품 유물이 나왔다. 선덕여왕이 생활하면서 간직했던 물건들이라 하니 같은 여성으로 친근감이 느껴졌다.

 

 

  뒤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다시 서 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이 눈에 밟혔다.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할 때, 적군의 횡포로 겪는 비극이 가슴 아프게 했다. 다시 황룡사로 나와 붉게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처럼 찡한 전율이 전해졌다.

  경주 낭산에 잠든 선덕여왕. 여자로서 나라 안팎으로 힘을 유지하며 지켜나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위로를 전한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교과서다. 세월이 전하는 흔적 때문인가 보다. 

 

 

 

 

▲박일례

한국사진문학협회 정회원

계간 『우리글』회원

계간 『우리글』신인문학상(2023)

제3회 계간『한국사진문학』신인문학상(2022)

『너 덕분에』시인투데이mini디카시집 출간(2023)

『어쩌다 디카시인』공동시집 출간(2022)

『백살공주 꽃대할배』그림책 출간(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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