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캐터필러(caterpillar)
예시원
11월의 마지막 주말, 밀양역의 새벽은 긴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한 채 는적거리고 있었다. 늦가을이기엔 소름이 오소소 돋고, 겨울이라기엔 어중간한 날씨다. 동팔은 오랜만에 기차여행을 해 보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해운대. 아침 7시 정각에 밀양역을 출발해 10시 45분에 해운대역에 도착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밀양역에 도착한 새벽, 낯선 사내의 한 마디가 첫 새벽공기를 가른다. “동전 있으면 몇 개만 주세요” 동팔은 호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마침 동전이 떨어졌다. 아니 떨어졌다기보다 동전이 생기면 돼지저금통에 넣어버린다. “동전이 지금 없는데요” “사람이 와 이래 돼버렸는지 모르겠네요. 한번 주저앉으니 일어서질 못하겠네요” 동팔은 지갑을 열어 천원을 건네주었다. 돌아서 가만히 생각하니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삼천 오백 원이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값도 되지 않는 돈 천원을 준 게 못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건 순간적인 감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오천 원이라도 줄 걸” 역전광장을 둘러봐도 그 사내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한발 늦은 동팔은 열차를 타고 있어도 차창 밖 풍경 속에 그 사내가 겹쳐진다. “그 사람 참, 소심하기는… 급한 일이 생겼다고 거짓말이라도 하지, 만원이라도 빌려달라고 하지… 그 사내도 나도, 참 소심한 남자다” 둔중한 무게에 비해, 정작 플랫폼에 몸을 부리는 열차는 경쾌한 느낌이 든다. 사뿐히 진입한 열차에 동팔은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탔다. 2호차 32호석. 서서히 밀양역을 벗어나는 열차는 예전의 그 길고 긴 철마의 기적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가볍게 출발했다. 새벽 찬바람을 쐬어서인가, 잔뜩 위축됐던 몸이 실내의 더운 공기에 서서히 긴장이 풀려간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의 머리에서 향긋한 풀내음이 풍겼다. 순간 동팔은 어제 사무실에서 보았던 여직원의 엉덩이가 생각났다. 새벽 찬 공기에 잔뜩 움츠렸던 바지 속의 그것이 갑자기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민망한 일이 있나…” 어제 아침에 본, 잘 익은 호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 여직원의 엉덩이는 무척 탐스러웠다. 하필이면 엉덩이 선에 걸쳐지는 아슬아슬한 바지를 입고 출근해서, 쪼그려 앉아 뭘 열심히 찾고 있었다. 보려고 해서 본 게 아니지만, 잔뜩 물오른 탱탱한 엉덩이 속살까지 보고야 말았다. “에잇, 작업이 끝났으면 후딱 일어나야지…그 참” 이 엉덩이와 그 엉덩이는 닮은꼴이다. 낮에 본 여직원의 엉덩이와 어제 밤에 본 아내의 엉덩이도 닮은꼴이다. 오랜만에 스물스물 솟아오르는 정열에 몸이 달아, 아내에게 찰싹 붙어 비벼댔으나 아내는 매몰차게 거부를 했다. “노터치(No touch)” 그것으로 끝이었다. 동팔의 부부관계는 오래전부터, 서로를 존중해주기로 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부부관계를 거부하면,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만약 무리하게 일방적으로 완력을 썼다간 죽음이었다. 공수특전 여군 하사 출신의 공포의 뒷발차기가 날아온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이, 피곤하다” “싸가지 없는 여편네, 칠거지악이다 칠거지악.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알고 말이야, 바깥으로 나도는 남자들이 다 이유가 있어. 에이그” 노터치(No touch), 천둥 같은 한마디에 동팔의 그것은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조폭마누라 보다 더 지독한 여자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이 아침에,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이 눈앞을 현란하게 하는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품인지 향수인지 모를 상큼한 냄새를 풍겨오고 있었다. 동팔은 아침부터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워매, 환장하겠네” 기차가 출발하고 한참이 지나자, 이 젊은 여성은 말똥말똥 빛나던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리며, 고개를 까치처럼 끄덕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래위로 흔들어대던 머리를 서서히 옆으로 기울이면서, 동팔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었다. “어허, 이것 참 난감하네” 젊은 여성의 몸에서 풍기는 상큼한 냄새는, 이미 중년을 넘어선 동팔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마치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고향의 냄새 같았다. “이 냄새는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냄샌데? 이 살 냄새도 그렇고” 차창 밖에는 희붐하게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선지국물 같은 붉은 파스텔을 산등성이에 비벼대고 있었다. 그동안 승용차와 고속버스에만 익숙해져 있어서일까, 기차를 타고 가며 바라본 밖의 세상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낯설었지만 잊어버리고 있었던 고향의 풍경들이었다. 간이역 지나 시골마을 낡은 집들의 굴뚝에선, 하나같이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낯선 새벽에 길을 떠난 아침에, 낯선 젊은 여성마저 동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어어… 오매, 이게 웬…” 전라도 순천 여자만 갯벌에서 나는 낙지는 잡을 때 특이한 방법을 쓴다. 숫낙지를 미끼로 쓰면 암낙지들이 착착 감겨든다고 한다. 여자도 전라도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그렇게 잘해준다고 한다. 아침 햇살에 비친 옆자리 젊은 여성의 얼굴이 청초한 풀잎처럼, 전라도 여자만 갯벌의 갈대처럼 가슴 시리게 예쁘다. 이 위대한 아침에 동팔은,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치며 온갖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며 즐기고 있었다. 어차피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는 젊은 여성의 냄새를 맡으며,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35년 전의 군복무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강원도 양구, 백두산부대 신병교육대. 동팔은 여산 하사관학교를 수료하고,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에 위치한 육군기술병과학교 ‘궤도차량 수리반’ 과정을 12주 마친 후, 자랑스러운 육군 하사 계급장을 마빡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아침밥을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앞당겨 먹은 교육생들은, 더블백을 챙겨 메고 버스에 올라탔다. 긴 어둠을 뚫고 도착한 곳은 부산진역. 더블백 위에 걸터앉아 대기하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마치 낯선 세계의 이방인처럼 대기병들은 도시의 타인들이었다. 군용 호송열차는 일반 열차보다 달리는 속도가 더딘 것인지 매우 느렸고, 중간에 정차하는 역도 드물게 한 번씩 섰다. 실내는 한낮에도 창밖을 볼 수 없게 가림막을 쳐 놓아서 답답했지만, 호송관의 무지막지한 눈빛이 두려워 감히 창문을 열고 밖의 공기를 마시지 못했다. 동팔은 배급받은 건빵으로 곡기를 달래며, 지루한 시간들을 입대 전에 사귀던 혜수와의 첫날밤을 떠올리며, 군복 속의 젊음을 달랬다. 그날 밤 혜수는, 마지막 보내는 동팔이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안의 혀로 천천히 때론 격렬하게 희롱해주었고, 동팔도 답례를 해 주었다. 싱그러운 젊음, 풋풋한 육체가 마지막 서러운 몸짓을 하고 있었다. 이별의 아쉬움을, 화산이 폭발하듯 뼈와 살을 태우며 밤을 보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혜수는 천둥 같은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그것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빼고, 툭 던진 것처럼 일촉즉발의 메시지였다. “미안해, 나 처음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지? 처음이 아니라니?” “이러는 거…” “이러는 거라면 혹시?” “그래, 나 이런 거 자기가 처음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혜수는 그동안 동팔과 사귀면서도, 여러 명의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하는 거지?” 동팔은 입대를 앞두고 기분이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말하려고 했지만, 동팔씨가 충격 받을까봐 말하지 못 했어” “충격이라니 무슨…” “동팔씨는 참 바보 같은 사람이야. 아니 너무 착해. 다른 남자들은 만나면 술 한 잔 하고 여자들을 모텔로만 데리고 갈 궁리를 하는데, 동팔씨는 매번 만날 때마다 집까지 배웅해 주는 걸 보며 내가 무척 미안했었어.” 동팔은 심한 배신감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아들이고 길게 내 뱉으며 심호흡을 했다. 담배를 다 태워갈 무렵, 혜수는 동팔이의 남성을 입으로 희롱하기 시작했다. 동팔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음은 심한 배신감에 혜수의 머리를 밀치고 싶었지만, 육체는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받아들이고 있었다. 혜수의 혀는 부드러우면서도 격렬했다. 움직일 때마다 동팔은 아득해짐과 함께 짜릿한 전기충격을 느꼈다. “아, 그만해 그만. 잘못하면…” 혜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동팔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안 돼, 그만해 그만… 아…” 혜수는 동팔의 모든 걸 받아들였고, 동팔은 뜨거운 젊음을 혜수에게 폭포수처럼 쏟아놓았다. 환희와 열락의 밤이었다.
“동작 그만, 전체 주목” 동작 그만이라니, 모두 얌전히 좌석에 앉아있는데 호송관은, 기차화통 삶아먹은 것처럼 고함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부터 이름을 부르는 놈들은, 한 놈씩 더블백을 챙겨서 내려라” 첫 정차 역에서 열다섯 명이 내렸다. 점점이 흩어지는 작은 섬들처럼 동기 놈들은, 그렇게 먹다 남은 건빵처럼 뿌려졌다. 두 번째 정차 역에서 절반가량의 병력들이 흩어져갔다. 모두 물 좋은 군수사, 군지사, 국방부나 수도권 기갑부대에 배치 받아 간다고 했다. 용산역에서 제일 많은 병력들이 하차했고, 나머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야간운행 길을 달렸다. 호송열차의 달리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제일 빽 없는 불쌍한 병력들이라고 했다.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감에 동팔은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늑대같이 으르렁대는 호송관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 담배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호송관이 화장실에 간 사이, 몇 명의 병력들이 잽싸게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허겁지겁 몇 모금 연기를 빨고 내뱉었다. 하지만 창문을 열 때 밖의 찬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어 왔기 때문에, 담배연기는 실내에 그대로 머물고 말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호송관이 담배냄새를 맡고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어쭈, 이 새끼들이 간뎅이가 쳐 부었나?… 어떤 새끼야?… 나와… 안 나와?” 호송관은 눈을 부라리며, 병력이 앉아 있는 열차 칸 통로 끝에서 끝까지 왔다 갔다 했다. “안 나온다 이거지? 전체 기상… 앉아, 일어서… 대가리 박아, 이것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겁 대가리 없이” 담배피운 병력은 다섯 명이었다. 나서지 않으면 전체 인원이 다 피해를 보게 되었다. 결국 동팔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예, 제가 피웠습니다.” “너 나와 이 새끼야. 사병들도 옆에 있는데 하사관이 그것도 못 참고 말이야” 호송관의 손맛은 매웠다. 몇 차례 번갯불이 번쩍이고, 뺨이 얼얼해지도록 맞은 뒤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맛있고도 비싼 담배는 처음이었다. 밤을 달려 도착한 곳은 호반의 도시 춘천이었다. 다시 우르르 내몰리는 돼지들처럼 더블백을 들쳐 메고 뛰었다. 육공 트럭에 실려 도착한 곳은 102 보충대. 사흘간 무위도식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낸 뒤, 춘천 소양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올라간 곳이 강원도 양구 백두산부대였다. 누런 똥물 같은 황사 먼지를 뒤집어쓰고 신병교육대에 다시 뿌려졌다. “빨리 빨리 안 내려? 이 새끼들이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인줄 아나? 개자식들아” 산 너머 산, 강 건너 강이라더니 하사 계급장까지 달고 신교대가 웬 말인가. “앉아… 일어서, 이 새끼가 돌았나? 말귀를 못 알아 처먹고” 이놈들에 비해서 논산 신교대의 조교들은 양반이었다. 한마디 하면 주먹질이요, 두 마디 하면 발길질이었다. 마치 잘 숙련된 조직폭력배들이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듯, 패고 차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첫날 신고식 때부터, 가혹한 매질과 기합으로 먹었던 음식을 전부 토해내고 말았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곳 백두산부대 신교대에서 철저하게 다시 교육시킨다. 지금부터 부착하고 있는 계급장을 전부 뗀다. 실시” 정식 교육훈련을 받았고, 하사 계급장을 달만 하니까 단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웬 날벼락 같은 시츄에이션인가. “이 새끼들이 말귀를 못 알아 처먹었나? 떼라면 떼란 말이다 이 새끼들아” 또다시 주먹질과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손으로 잡아 뜯고 이빨로 물어뜯어 겨우 신속하게 계급장을 다 떼 냈다. 동기 중 한 녀석이 동작이 느려 너덜너덜하게 하사 계급장을 붙이고 있었다. “이 새끼가 개겨? 너 오늘 한번 죽어봐라. 백두산의 뜨거운 맛을 보여 주마” 조교는 끔찍하게도 녀석을 두들겨 팼다. 마치 복싱선수가 샌드백을 두들기듯, 한참동안 패고 차니 곡소리가 연병장을 울렸다. 동기 녀석의 입에서는 피 섞인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그렇게 혹독한 신고식을 거쳐 우리에게 지급된 것은, 일반군복이 아닌 유격훈련복이었다. 그것도 푹푹 썩는 냄새가 짙게 밴 누더기들이었다. 조교는 2주 동안 특공훈련을 받는다고 했다. 하루 네 시간씩 일반 신병교육생들과 섞여 훈련을 받고, 나머지 네 시간은 따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사병들 중 빨리 입대한 녀석은 후반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 달이면 일병으로 진급하는 대상도 있는데 이게 웬 일인가. 말이 훈련이지, 거의 패고 차고 굴리면서 악을 키우는 게 전부였다. 오로지 고함지르고 악을 써대며, 산악구보를 하고 유격장을 오르내리는 훈련이었다. 어떤 날은 복창소리가 작다고, 네 시간 내내 하늘이 노래지도록 고함만 질러댔다. “백두산 유격대, 백두산 유격대…” “전투 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독사가. 발사”
//검푸른 복장 삼킬 듯 사나워도/나는야 언제나 독사 같은 사나이/막걸리 생각날 때 흙탕물 마시고/사랑이 그리울 때 일만 이만 헤아린다/사나이 한목숨 창공에다 벗 삼아/굳세게 살다가 깡다구로 죽으리라/아~ 창공은 나의 고향/창공은 낙원이란다//
목이 쉬어 터져 소리가 나오지 않는데도,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고 나면 신기하게도 다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기 열다섯 명 중 목에서 피가 나오지 않은 녀석들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모두들 전사처럼 눈빛이 달라졌다. 독기가 번쩍번쩍 풍겨 나왔다.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밥도 제때 먹지 못했다. 일반 훈련병들보다 급식량을 적게 지급했고, 그것도 겨우 두어 번 숟가락질을 하면 “동작 그만”이었다. “동작 그만, 식사 끝. 이 새끼들이 또 말을 못 알아 처먹네. 식사 끝이란 말이다 이 개새들아” 숟가락질을 한번이라도 더 하면 사정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발길질에 식판은 뒤집혀 밥과 국, 반찬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지금부터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깨끗이 주워 먹는다. 실시” 음식을 깨끗이 주워 먹지 않으면 여지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식사 후 잔반통으로 갈 때도 함께 이동해야만 한다. 이동 간에 군가를 부르며 식판을 턱 밑에까지 들고 가야한다. 조금이라도 내리면 식판 밑으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식판은 뒤집어지고 훈련복(유격복)은 오물을 뒤집어썼다. 훈련복에서 나는 푹푹 썩은 냄새도 바로 그런 오물과 땀 냄새였던 것이다. 바로 전 기수에서 입었던 유격복을 제대로 세탁하지도 않고, 다음 기수 병력들이 그대로 지급받은 것이다. 내무반에 있는 모포에서도 썩는 냄새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총검술, 각개전투도 여산에서 이미 훈련을 받았지만, 백두산 신교대에서는 두 배나 더 강도 높게 시켰다. 물론 여산 하사관학교에서는 구타 및 가혹행위가 없었지만, 백두산 신교대에서는 끊임없는 구타와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드디어 지옥 같은 2주간의 특수훈련이 끝나고, 다시 하사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퇴소식 날 육공 트럭에 올라타는데 교관들이 소리쳤다. “고생들 많았다. 그동안 미안하다. 자대에 가면 여기서 한 고생은 고생이 아니다. 각오들 단단히 해라.” 그렇게 해서 배치된 곳이 백두산 전차중대였다.
스무 몇 살 푸른 몸뚱이로 맞은 분계선 근처, 우울한 대설주의보에 하루가 시작된다. 철책보다 넓게 쌓인 설겅한 눈길을 딛고, 순즉한 초병들은 931고지에 오르고, 방한복 지퍼를 힘스레 끄당기며 겨냥한, 가늠구멍 너매로 빙점의 땅이 밀려온다. 눈은 내려 천지사방을 뒤덮으나, 여전히 전쟁의 흔적은 지우지 못한 채, 아무것도 외면할 수 없는 거뭇발어둠 속에서 초병은 적정을 살핀다. 맨발의 사랑으로 조국을 지켜야만 산다고, 유배지보다 더 멀리 나간 그들의 눈빛처럼, 갑자기 치는 무수리바람이 적 GP쪽의 어둠을 젖히며 나타난다. 신새벽 한때의 햇살이 땅의 중심으로 내리면, 마지막 남은 조준선에서 결빙의 철조망도 아즐하게 무너져 내린다. 남방 한계선, 북방 한계선 길섶 따라 귀 막고 돌아누울 수 없는, 조국의 산하를 위해 초병들은 비금찬 아침을 털어낸다.
첫 휴가 때, 다시 혜수와 만나 데이트를 한 곳이 지금 가고 있는 해운대였다. 좀 더 성숙된 뜨거운 입맞춤을 한 곳도 해운대였다. 남자다운 남자로 다시 태어나 혜수를 사랑하겠다고, 밤마다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나 입대 전 마지막 밤처럼 혜수는 담담했다. 사랑이라기 보단 그저 ‘쿨’하게 즐기자고 했다. 입대 전날 밤에 혜수는 태봉의 모든 것을 쏟게 만들었지만, 이번엔 태봉이 혜수의 몸을 달뜨게 만들었다. 깊은 옹달샘의 마지막 한 방울 이슬까지 모두 흡입하듯 빨아들였다. 태봉의 혀 놀림에 혜숙은 몇 번씩이나 탄성을 지르며, 흥건히 땀을 흘리고 자지러졌다. 아침에 샤워를 하며 보니, 거울에 비친 태봉의 등짝엔 삼지창 자국이 깊이 패여 있었다. 조금은 쓰라렸지만 태봉은 휘파람을 불었다. 혜수는 뭐가 좋은지 침대에 누워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볼을 깨물어주고 싶도록 예쁘다. 그렇게 해운대에서 첫 휴가를 뜨겁게 보낸 후, 말년휴가 때 결국 혜수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제대 후 수소문 끝에 알아낸 소식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아, 정말 무슨 결혼을 그렇게 일찍 해? 나이 스물다섯에 무슨 결혼이야? 아 정말,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라”
10시 45분, 열차는 드디어 해운대역에 도착했다. 태봉의 어깨에 기대 꾸벅꾸벅 졸던 젊은 여성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빨딱 일어서서 제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아, 아쉽다. 저 머리 냄새” 태봉은 젊은 여성의 싱그러운 냄새와 체온의 여운이 남아, 목적지인 해운대역에 도착한 것도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 마리 암말처럼, 앞에 걸어가고 있는 저 젊은 여성의 뒷모습이 마치 혜수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저 향수냄새, 화장품 냄새는 혜수의 냄새야. 살 냄새도 그렇고 저 찰랑거리는 머릿결하며 걸음걸이는…” 왜 그렇게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냄새였는지 태봉은 뒤늦게 알았다. 황급히 그 여성을 뒤쫓아 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둘 다 내린 곳은 해운대였다. 저만치 앞서 걸어가던 젊은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혜수였다. 태봉은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혜수를 마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혜수는 태봉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태봉은 혜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단결, 하사 주태봉 김혜수에게 신고합니다. 하사 주태봉은 김혜수를 앞으로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시원한 겨울바다 바람이 동팔의 귀틈배기(뺨)를 때리고 지나갔다. 저만치 해수욕장 쪽에서 대한의 군인 한 명이 젊은 여성을 향해 손을 흔들고 거수경례를 붙였다. 왼팔 어깨위엔 파란 바탕에 흰 백두산 마크가 선명히 부착돼 있었다. 젊은 여성도 까르륵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지런한 하얀 이가 참 예쁘다. “어쭈 저 자식도, 백두산 부대네” 동팔은 두 젊음을 보며 부러움과 얄미움이 함께 교차하는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짜식, 참 좋을 때다. 부럽다.”
꿉꿉한 중년 사내가 기울고 있다. 그는 동팔이고 동팔은 그였다. 회를 곁들인 낮술 한잔에 청춘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마주치는 젊음들을 바라본다. 아찔하게 현기증 나는 허벅지, 새로 씹은 껌처럼 탱탱하고 쫄깃한 엉덩이들을 본다. “쟈들은 겨울에 춥지도 않나? 저리 짧은 옷을 입고 다니고…” 탱탱한 젊음이 너무 부럽다 못해 얄미운 중년은 그저 쩝쩝 쓴 입맛만 다셨다. “아, 아쉽다. 저 철철 흘러넘치는 젊음은 왜 내 것이 되지 못하는가?” 복숭아 같은 엉덩이, 미꾸라지처럼 매끈하게 쭉 뻗은 다리, 그 옆에는 싱그러운 사내아이들이 찰싹 붙어 다녔다. 동팔은 그 사내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내게도 탱탱한 젊음이 있었던가? 분명 있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깨물고 싶은 그녀의 가슴과 허리를 안고 불나방처럼 밤길을 찰랑거린 때가 있었다. “아이야, 네 젊음이 너무 얄밉다. 네 청춘이 너무 부럽다…” 강여울 따라 길게 누운 시간을 거슬러, 녹음 짙은 팔월의 묏굽이 따라, 붉으레미한 불살이 삣낙질하는 한낮이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시간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해 힘들어 하는, 저 사내와 멧비둘기는 지친 우듬지 끝에 하루를 접는다. 몰래 살살 뒤따라와 됐나 됐다 했을 때, 불쑥 뒤통수를 치며 놀래키는 것도, 헛짓의 인생이라는 녀석이고 빠져나가게 도와주는 것도 인생이다. 가다가 지칠 때 그녀석의 손을 꺼당겨, 잠시 앉아 쉬었다 가는 것이다. 그냥 편안하면 주저앉아 버리고 불편하면 일어나 다시 가면 될 것을. 맨발로 가는 시계는 누구도 훔쳐가지 않는다.
“뭐 하노? 한잔 안하고? 한잔 받아라” 앞에 앉은 부산의 동기 녀석이 이죽거리며, 소주병을 들었다 내렸다 한다. “니 또 그 혜수 그 가시나 생각하제? 콱 고마 너거 마누라한테 일러준다이, 헤헤” 모처럼 맛있게 먹은 술이 다 확 깬다. 바닷가에선 청춘들이 두 손을 꼭 잡은 채 겨울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다. 아이들은 새우깡을 던지며 갈매기들을 부르고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옛 추억을 생각하면서 달맞이고개 한번 가 볼래?” 동기 녀석이 너스레를 떨며 바람을 잡는다. “다 삭은 남자들 둘이서 뭔 재미로?” “에헤이, 이 사람아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아나? 저기 가면 내 여자 친구하고 자기 친구가 와있다. 예쁜 아지매던데 한번 만나봐라 괜찮을 기다” 동팔은 다시 술맛이 동한다. 늙다리 중년의 볼따구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야 이 사람아 진작 좀 말하지. 고마우이” “기분 좋게 한잔하자. 좋은 날은 좋은데이로” “위하여…지화자…좋다” “브라보” 동팔은 예전에 대학 다닐 때 밀양에서 부산까지 통학을 했었는데, 강의 끝나면 꼭 대폿집에 들러서 한잔씩 먹고 차에 오르던 생각이 났다. 밀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를 타면 통학하던 여학생들이 참 많았다. 그때만 해도 동팔은 얼굴이 동안(童顔)이라서, 여학생들이 공연히 옆자리에 앉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트림을 ‘꺼억’ 내뱉으면 막걸리에 쉰 김치냄새까지 함께 올라오니, 질색을 하고 달아나 버렸다. “아, 오늘은 어디 가서 사우나나 좀 하고 가야겠네 그려” “안갈 것처럼 하더니만 기분이 좋긴 좋은 모양일세” “어허허…” 멀리 길게 오후 햇살이 해운대 바닷물에 황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걸쳐지고 있다. 두 중년 사내도 저녁 햇살처럼 잔뜩 달떠 오르고 있었다. 밤새 교교한 달빛 아래 물레방앗간의 수차는, 쏟아지는 폭포수에 돌고 또 돌아간다. 이미 쏟아진 물이건만 그칠 줄 모른 채, 빈 방앗공이는 저 혼자 쿵쿵 방아질을 계속 해댄다. 석탄 백탄, 저 괴이한 헛짓은 언제 그칠 것인가. 헤어짐이 아쉬워 날이 새고도 또 쿵쿵 찧어대고 있는 것인가 그리워 찧는 것인가. 누구는 떡을 밥 먹듯이 먹는데, 누군 굶기를 떡먹듯이 하니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는가. 혼자 돌아가는 물레방아에 짝 없는 뻐꾸기도 밤새 따라 운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서, 편의점에서 이천 원짜리 김밥 한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어떤 중년 사내가 빵과 간식거리, 담배 두 갑을 얹어놓고 다시 두 갑을 더 주문한다. 간식거리는 그렇다 치고, 담배 값 이만 원과 간식거리에 하루 일당이 날아가는 아침이다. 며칠간의 땟거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담배 값이 더 늘어나고, 허기가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다. 중년사내는 담배 네 갑과 군질 거리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처진 어깨에 뚱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사라져간다. “일하러 가는 것일까? 검은 봉지처럼 구겨져, 자다 일어난 검은 터널로 다시 들어가는 것일까? 안온한 달팽이 껍질 속으로?” 멀리 동해의 붉은 태양이 힘차게 불끈 솟아오른다. 하지만 초라한 중년의 손엔 한 끼 식사와 군질 거리가 든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에이그 저 사람도 나도 별반 다르지 않네. 밤만 긴 줄 알았더니 하루해도 아득하다. 집 놔두고 해운대까지 와서 내가 이거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에이 망할 놈의 여편네 때문에 이 뭔 꼴이고?”
【본 소설의 내용은 호프집에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와 작가의 상상력을 각색하여 엮은 허구의 스토리임을 알려 드립니다. 작중 인물묘사와 관련하여 현실과 착오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예시원 : 작가·문학박사 〈월간문학〉 짬뽕 한 그릇, 〈한국소설〉 짬뽕 두 그릇 등단 / 소설집 『토영 통구미 아재』, 시집『누가 바다의 이름을 부르는가』, 수필집, 평론집 다수 발간 / 한용운문학상, 한국문학상, 박남수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수필가협회, 서울시인협회, 경남소설가협회, 경남시인협회 회원 /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계간『시와늪』주간·심사위원, 한국문학세상 심사위원, 문학춘하추동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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