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告白)
보고 싶어 하지 않는데 보게 하는 것도 보여줄 것이 없는데 보여주어야 하는 것만큼 어렵지
시(詩)를 쓰기 때문에 시인? 시인이 되었기 때문에 시를 써야?
시인이 되면 시는 가슴에 품은 채 시인이 아니었던 손과 발 얼굴은 방안 어디쯤에 숨겨두고 시인이 되었다는 자격증을 명함 뒤쪽에 복사하여 달밤에만 모르는 이를 만나야 하는 걸까
그는 알았다 읊조린 샘물 한 바가지 강물로 흘러 바다를 만들리라는 것 그가 쓴 시(詩)는 한 구절도 없다 했지만 세상 사람은 그가 쓴 시라고 안다 성경이나 불경처럼 시(詩)를 경(經)으로 끌어올린 그의 시를 아무도 시인이라 말하지 않지만 사실 그는 시인이다
남들이 시인을 할 만하다고 한 뒤에야 알 수 없는 물음 하나 툭 몸 어디쯤에 시(詩) 씨앗을 묻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입으로 말하고 쓰고 쓰고 웃고 울며 사는 것을 시(詩)라 하면 되냐고 안 되냐고
알고 싶은 것만큼 답해주지 않는 이들에게 염치없이 묻는 것도 어렵다
세월
금자는 오늘도 솔가리 두 장 오리목 마른 잎사귀 두 가마니 긁어왔다 어무이는 쳇 쳇 그것도 일이가 마루에 걸린 호롱불이 들 듯 말 듯 흐릿한 부엌에서 안방 아궁이 잔불 밀어 넣으며 신작로 걸어 시집온 금자는 늦은 저녁을 삼킨다 살짝 금 간 툭바리 담긴 시래깃국에 보리밥 두 숟갈 불땀 없는 청솔가지 연기 겨울만 되면 늘 오소리 굴을 만든다 불을 삼키는지 토하는지 아부지는 굴뚝이 낮아 그런다면서도 해 길어 땅 녹으면 손볼 염은 까마득 며느리 니가 하는 일도 일이가 해토머리 지나면 나라도 고쳐야지
통시에 앉아 밑딲이용으로 던져둔 신혼일기 옛날 같으면 초시(初試)는 너끈히 붙었을 필체 좋은 재종 형님의 버려진 날들 동네 사람들이 일 잘하는 금자 금자 해쌌더니 오산 당숙모네 맏며느리 이름이 금자랐네 찢어 구겼던 정월 스무날 하루를 쪼그려 앉은 채 누르고 펴서 침으로 다시 붙인 후 일도 안 보고 일어서 나왔다 아들과 같이 산다며 청도 어디쯤으로 간 형수 내일이 형님 기일이라며 그냥 데름한테 전화한다면서 웃고 끊었다 앉은뱅이책상에 꽂아두었던 일기장 쪽 찐 머리 금자 형수 사진이 어딘가는 있을 텐데
▲이덕대 *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 계간 우리글(2024) 시 부문 신인문학상 * 김포문학(2017) 및 한국수필(2021) 신인상 * 한국수필 2023 ‘올해의 좋은 수필10’ 선정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 수필집 출간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2023)> <내 마음 속 도서관(2024)> * 시인투데이 작품상(2024) <한통속 감자꽃> * 한국수필가협회 및 한국문인협회 김포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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