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꽃물
이덕대
피고 지는 꽃은 시간의 흐름이자 생명의 순환이다. 뿌리나 줄기가 자라고 잎이 돋는 것도 그 이치는 매일반일 터다. 그럼에도 꽃은 생명을 잇고 세대를 연결하기 위해 특별한 향과 빛깔, 달콤한 꿀을 만드는 지혜를 지녔다. 꽃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식물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다.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잇기 위해서 피는 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자연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아침 이슬에 빛나는 마을 우물가 무궁화는 엄숙하고 신비로운 영혼의 꽃이었다. 여름이 오고 무궁화 꽃이 피고 지기 시작하면 알 수 없는 가슴 벅참과 묵직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나라꽃이라는 상징성이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반면 꽃밭 가장자리에 비켜선 봉숭아꽃은 서러움이었다. 울 밑에 피어서 서럽고 모진 비바람에 쉬이 떨어져 아쉬웠다. 꽃잎이 다 떨어지고 대궁에 솜털만 남을 때쯤이면 손대지 않아도 씨앗 자루가 저절로 터져 까만 씨앗이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윽고 서리라도 내리면 할 일을 다 한 봉숭아 마른 고갱이는 억센 대 빗자루질에 무참하게 쓸려 나갔다.
튼실한 대궁과 풍성한 잎 사이에서 피는 봉숭아꽃을 어느 시인은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모닥불 약쑥 연기가 진양조로 흔들리면 꽃잎파리 싸맨 손톱에서 초경보다 더 붉게, 세상살이 어려움에 붉게 젖어 타던 속내가 손가락 끝마다 혼 불로 지펴지던 아픔의 꽃’이다. 선 분홍 꽃물은 웃어도 울음이 되는 눈물의 꽃이다. 순수의 시간을 기다리는 꽃이며 짓이겨질수록 붉은색을 단아하게 드러내는 누님 같은 꽃이다. 무더위가 물러가는 유년의 여름 끝물은 누나와 봉숭아꽃으로 기억된다. 하늘은 높고 유난히 파랬다. 감들은 붉게 익어가고 무성하면서도 진녹색이던 감나무 잎들은 알록달록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다. 텃밭의 고추들도 붉어지고 하룻밤 사이에 가지들은 몰라보게 자란다. 우물가 화단에는 저절로 뿌리내려 제멋대로 자란 봉숭아가 한창 꽃을 피운다. 어느 꽃이든 꽃은 계절 변화의 나침판이다. 가을이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철 이른 귀뚜리가 밤마다 화단에서 낮게 운다. 금색 씨로 불룩해진 꼬투리를 터트리는 재미가 오달지다.
갈바람 잘 통하는 대청마루에 누워 떠가는 뭉게구름 쳐다보며 누나는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이빨 빠진 작은 사기 종지에 잎과 꽃을 따서 넣고 명반을 함께 으깨 정성스레 손톱을 덮었다. 꽃물을 들이는 산골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여름내 구슬땀을 흘리며 집안일을 돕던 누나는 스스로에게 대접을 했다. ‘예쁘게 들었네,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을 것 같다’는 둥 옆집 언니 동생이 부러움으로 주고받는 말들도 손톱에 함께 감았다. 감나무 잎이나 비료 포대를 잘라 감싼 뒤 반짇고리 속 실을 찾아 칭칭 동여맸다. 첫눈을 기다리는 염원을 담았다. 요즘 도심에서는 봉숭아를 보기가 쉽지 않다. 손톱 미용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도 많고 손톱 치장용 화려한 재료들도 많으니 누가 한가롭게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있을까. 정성스레 꽃을 따서 찧고 손톱에 감싸던 일들은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사라져간 즐거움을 퍼올려주는 마음의 두레박이 되었다. 투명하리만치 연약하던 봉숭아 꽃잎에는 한여름 폭우와 천둥번개에 푸른 하늘이 담겨있었다.
▲이덕대 *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 김포문학(2017) 및 한국수필(2021) 신인상 * 한국수필 2023 ‘올해의 좋은 수필10’ 선정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 수필집 출간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2023)> <내 마음 속 도서관(2024)> * 시인투데이 작품상(2024) <한통속 감자꽃> * 한국수필가협회 및 한국문인협회 김포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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