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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 채유리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1/10/24 [01:51]

내게는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 채유리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1/10/24 [01:51]

내게는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 채유리

 

우리집은 재개발 단지에 터를 놓고 백하고 네개의 계단을 더 올라야 당도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은 어딘가 시들한 굴삭기 소리와 함께 밀려가는 집들이 즐비했고 돌계단은 먼지 섞인 흙으로 덮어지기 일쑤였다. 그곳에는 내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작은 슈퍼 앞을 밤새 거닐던 날들이 있었고, 이제는 황폐한 모래밭이 된 저 위 언덕을 힘겹게 올라 땀에 절은 채 미친 듯이 뛰어놀던 날이 있었다. 이따금씩 방 안에 누워 퀘퀘한 먼지 냄새에 숨이 막혀 눈을 감았을 때도 귀신같이 찾아와 나를 일으켰던 날이 있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함께였던 친구였다.

 

재개발이 착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집에도 철거 통보가 내려졌다. 엄마, 아빠는 어린 내게 우리집을 멋진 집으로 변신 시켜주는 거라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알지 않아도 된다는 듯 허울뿐인 말로 입을 막았지만 그들의 표정에 비친 초라한 설움을 어린 나는 모르지 않았다. 예상한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쫓기는 기분은 어쩐지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때도 옆에 있던 그 아이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 곳을 떠나던 날, 우리의 기억이 묻어있던 그곳에서 나는 그 친구와 인사도 못하고 떠나왔다.

 

어두스름한 새벽을 깨워 도망치듯 날 업고 나왔던 아빠의 등을 다시 바라본 건 햇빛이 시릴 정도로 만연한 오후였다. 지긋지긋한 그곳을 벗어나 정착한 곳은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백하고 네 개의 계단을 올라야 당도할 수 있었던 집은 이제는 단 열네개의 칸만 내려가면 당도할 수 있는 곳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내게 이제 다리 아프다고 투정 부릴 일도 없겠다며 웃었지만 어린 나는 퀘퀘한 곰팡이 냄새에 울음을 터뜨렸다. 냄새는 지울 수가 없었고 가난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보다 그 아이를 두고 왔다는 사실로 반쯤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시렸다. 그 아이는 내 유일한 친구였다.

 

지긋지긋한 그곳을 벗어나고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어리다는 언어가 내게 들어맞지 않은 나이가 되자 이따금씩 그 아이의 생각이 떠올라도 울지 않았다. 이제는 어리지 않았기에 울지 못했다. 울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나는 해야할 일을 기억하듯 그 곳을 다시 찾아갔다. 굴삭기 소리 대신 재개발 분쟁으로 잔뜩 울분에 섞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 차있었고, 멋진 집으로 변신 시켜준다던 엄마의 말은 정말 허울로 돌아가 아직 그 곳은, 어쩌면 전보다 더 메마른 황무지가 되어있었다. 어린 날의 나였다면 우리의 흔적이 남아 다행이다 여겼을 일이었지만 어른이 된 내게는 단연코 불행이었다. 너는 여전히 이 곳을 떠돌고 있었다. 네가 여전히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이 이제는 불행의 일이었다.

 

형체가 거의 없어진 뭉툭한 계단을 겨우 올라갔다. 기억을 더듬어 그곳에 당도한 순간, 여전히 집 앞을 떠돌던 너를 발견했을 때. 그때서야 나는 알았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도, 내가 너를 버린 것도 모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차라리 평생의 짐으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것이 비겁하지만 내 바램이었다. 나는 너를 떠나온 게 아니라 버렸음을 마주하였을 때.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여전히 나의 친구로 남아있던 너를 바라보며 해야할 일이 있었다. 내게는 오랫동안 묵혀온 해야할 말이 있었다. 미안해. 버려서 미안해.

 

그곳은 친구 잃은 오래된 떠돌이 개들이 각자의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프로필

한국외국어대학교 네덜란드어과 채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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