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금박지게 살어리랏다
예시원
며칠째 이른 초겨울 영하의 혹한이 찾아왔다. 현석은 퇴근길 버스 창가에 비친 아파트를 보았다. 불 꺼진 창가의 어둠, 그 옆엔 한 줄기 빛이 있다. 그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본다. “저 집 사람들은 행복할까,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는 집도 있고,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불 꺼진 창엔 나처럼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살겠지.” 퇴근 시간 회사 정문 앞에서, 현수는 트럭에 실린 추운 단감을 보았다. 서리 맞기 전에 작업을 서두른 것 같은 모습에 발길이 멈췄다. 칼바람 속에 서 있는 사내는 단감을 급히 팔지만 그 속은 쓰릴 것이다. 떫은 감 같은 속을 달래느라 오늘 밤도 찬 소주를 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수는 허전한 속을 찬 소주로 달래본다. 내일은 속 풀이로 단감을 깎아 단물처럼 단 인생을 느끼고 싶다. 트럭에 실린 단감을 보니 고향의 아버지와 감 밭이 떠올랐다. 퇴근길에 마주친 포장마차 앞을 무심히 지나치다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차가운 트럭 짐칸에서 늦은 밥을 먹는 사내의 움직임 따라 냄비가 달그락댄다. 그 들썩이는 어깨를 따라 현수의 어깨도 덩달아 들썩인다. 저만치 가다 되돌아와 순대 오천 원어치를 주문했다. 눈앞에 뽀얀 김이 솟아오르고 칼질에 잘린 내장에선 핏물이 묻어났다. 사내는 꾸역꾸역 찬밥을 마저 먹고 현수는 꾸역꾸역 순대를 먹었다. “당신은 왜 찬 바닥에서 밥을 먹고 난 순대를 먹어야 하나?” 돌아서는 발걸음 끝에 핸드폰이 울렸다. 수많은 나날을 밤거리에서 휘청거렸던 젊음의 흔적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었다. “행복한 날 보내세요, 아가씨 대리운전” 누군가에게 떠밀려 나온 생처럼, 폐품 같이 구겨지는 서민들의 삶을 더욱 움츠리게 하듯, 찌푸린 하늘엔 성난 눈이 내린다. 현수는 매일 출 퇴근길에서 마주치는 나무가 한그루 있다. 거리의 가로수가 봄이면 온통 화려하게 빛을 발하던 벚꽃 나무다. 그중에서 아침, 저녁으로 그의 마음을 괴롭히던 것이 마지막 코너에 위치한 나무다. 매일 지나치면서 어느 순간 자신이 그 나뭇가지에 집착하여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너무 안쓰러워 나뭇가지를 잡아떼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반쯤 부러진 상태에서도 잎이 파릇파릇 살아남는 것을 보며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그래서 오가며 마음속으로 그 가지에게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그래 너는 반쯤 부러졌지만 그래도 나뭇가지다. 마지막까지 매달려서 나무로서의 의연함을 가져라. 힘을 내라” 만약 그 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말라 죽었다면 볼품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지는 두 달간 힘겨운 사투를 벌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현수는 그 나뭇가지에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였다. 마지막 갈 때까지 나무의 의무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현수는 그 나뭇가지의 죽음을 놓고 숙연함을 느꼈다. 경우는 다르겠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 목표와 목적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한 번쯤 생각해볼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도 결국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귀청을 아프게 때리는 알람 소리도, 째깍째깍 통근버스 시간을 재촉하는 바늘도, 뜨거운 호흡과 종종거리는 발걸음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죽은 삶은 죽은 시계처럼 움직일 수 없다. 오늘도 살아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해를 보낸다. 어제 본 그 사람을 오늘 또 본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다. 지겹지만 지겹지 않은 것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내가 숨 쉬고 살아있는 지금과 가장 행복한 순간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미워하고, 때론 웃으며 마주 보고 있다는 건 감사해야 할 일이다
현수의 부친 박동만은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70년대에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사막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굴곡 많았던 그의 삶은 영광과 상처를 늘 함께 안고 있었다.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조국을 희망으로 승화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현재 삶은 너무 초라하기만 하다. 열사의 나라에서 같이 고생한 동료 중에도 가족이 해체되어버린 사례가 많았다. 동만도 동생의 사업실패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까지 가정을 지키며 살아왔다. 현수는 사춘기에 가난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자라 주었다. 동만은 늘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못 해주는 것이 괴로워 비틀거렸지만 악착같이 살아 보려고 고향에서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농촌을 떠나 있었던 동만이 농사일을 다시 하기엔 너무 서툴러서 심는 작물마다 실패를 많이 겪었다. 살려고 파닥거리면 힘 빠져 죽고 힘을 빼고 축 늘어져 천천히 움직이면 산다고 했다. 아주 오래오래 간다.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때로는 한 치 한 발자국도 더 못 나가게끔 막는 어떤 더 큰 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남한산성에 갇힌 왕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핍만 한다. 내핍을 오래 하면 못 참는 자는 달아나고 오래 참는 자만 남는다. 답답해도 할 수 없다. 지독하게 내핍을 하면 봄 같지 않은 봄이지만 눈 녹으면 봄이 오긴 온다. 박동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는 오기가 치솟았다.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 밑 마루에 누워 있는 동만은, 벌써 두 번째 플라스틱 막걸리 병을 비우고 있다. 빗물을 철철 흘리고 있는 TV에선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청년 실업자가 백만이라고 요란을 떨고 있다. 철퍼덕 자빠진 막걸리 병 옆엔 똥파리 한 마리가 뭘 잘못했는지 동만을 향해 두 손바닥을 빌고 있다. 바짝 마른 쥐포 쪼가리를 씹으며 파리를 쫓아내려다 그만, 누운 막걸리 병을 건드려 누런 찌꺼기를 토해내게 하고 말았다. “이게 뭐여 이런 게 다 있어? 똥파리 땜시 막걸리도 못 마시겄네. 에이 젠장 더러워서 진짜” 동만은 혼자 중얼거리며 발로 걸레를 밀어 쏟아진 막걸리를 닦아냈다. 학교 앞에서 떡볶이와 김밥, 어묵 장사로 평생 모은 돈 20억을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서 장학금으로 내놓은 어느 할머니의 기사가 방송에 나왔다. 자신은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배운 한을 이렇게라도 풀고 싶어서 아낌없이 희사했다고 한다. “무슨 놈의 억이 누구 집 똥개 이름이여? 할망구 참 대단 하네 이. 나한테 그 돈 십 분의 일만 있어도, 내 팔자가 이렇게 꼬이지는 안 했을 것인 디” 그때 녹슨 철문을 밀치며 푸른 작업복 차림의 현수가 들어온다. “아부지, 또 대낮부터 술이세유? 인차 제발 고만 좀 드세유” “현수야 미안 혀어. 너는 내가 꼭 대학교 보낼라구 혔는 디. 너 입고 있는 실습복 보니깐 내 복장이 터지는구먼. 애비도 노동자 자슥도 노동자 집안 꼬라지가 이게 뭐여.” 동만은 고학하면서 야간 공업고등학교를 나온 자신의 뒤를 이어, 자식마저 교복 대신 푸른 실습용 작업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슬픔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예산댁이 고구마가 가득 실린 외발 리어카를 세우며 들어온다. “현수 아부지 왜 그러셔유 무신 일 있시유?” “아니여. 내가 저놈의 자식 쳐다 보먼, 억장이 다 무너져서 그려” “그래도 쟈 만한 아들도 없시유. 지네 부모 고생 한다고 지가 알아서 공고 안 갔시유. 그래도 지들 학교서 원체 공부를 잘 하니 께, 선상님들이 아깝다구 자꾸 대학교 시험 보라고 혀서, 요즘 마음이 좀 심란한 모양이더라구유.” 그랬다. 현수는 공고를 졸업하면 취업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집안에 부담을 줄이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는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나중에 야간대학이라도 갈 생각이었다. “현수 아부지, 생각하먼 맴이 아프지만 그래도 현수가 얼매나 기특혀유?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 되는 걸 워떡혀유? 넘들은 번듯한 집에 재산이 많아도 삐딱하니 빗나가는 자식들이 있는 디, 현수가 너무 철이 빨리 들어서 탈이지 바르게 잘 자라주는 것만 해도 다행 아녀유?” “우리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는 법이 있겄시유? 당신도 인자 술 고만 자시고 하는 데 꺼정 한번 아금박지게 살아 봐유.” 동만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공연히 먼 산만 쳐다보며 껌뻑거렸다. 길게 내뿜는 뽀얀 담배 연기가 자신의 앞날처럼 느껴져 한숨만 내 쉬었다. 동구 밖에는 손발 다 잘린 나무가 아직도 살아있다. 그것도 모가지가 잘린 채 살아있다. 마을 입구를 굳건히 지키며 서 있는 저 나무는 가슴을 사정없이 뎅겅 잘리고도 그저 굳세게 서 있다. 비, 바람, 흙이 그를 도와 새 생명을 잉태하니, 하매 마를라나 하매 마를라나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 아래서 고개를 숙인다. 뎅그런 밑둥치를 보면 동만은 마음 깊은 곳에서 ‘툭’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만은 아무도 없을 때 희한한 그 나무를 엉덩이 밑으로 고개 숙여서 보았다. 다리만 잘린 나무 세상은 거꾸로 돌고 있었다. 머리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웃고 즐기며 숨 쉬고 있다. “그것 참 끄떡도 안 하네. 희한한 일이다.”
동만이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건 중동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이었다. 3년간 폭염 속에서 고생해도 희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었던 건, 아내와 함께 조그만 가게를 하려던 계획이 거의 달성 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3년이 거의 다 돼갈 때 동생의 사업실패로 부부의 그 소박했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중동으로 떠나기 전에 보증을 서 준 것이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열사의 나라에서 개미처럼 일하고도 자신은 돈 한 푼 쥐어보지 못하고 몽땅 날아가 버린 것이다. 동생은 잠적해버리고, 예산댁과 어린 현수가 살고 있던 전셋집도 나와 당장 오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엔 빈손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가 땅에서 땀을 흘려야만 했다. 어렵게 구한 자갈논과 황무지 밭에서 새로 시작했다. 가을이면 푸근한 결실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행복도 잠시뿐이었다. 우루과이 라운드다 한미 FTA다 뭐다 해서 각종 수입 농산물이 우리 시장과 밥상을 잠식했고, 사람들의 입맛도 우리 것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더 갈 데가 없는 동만은 끝까지 땅을 지키며 살고 싶었지만 갈수록 삶은 팍팍해지기만 했다. 둑길에 심어놓은 콩잎은 목이 탔다. 쩍쩍 갈라진 논바닥과 동만의 머리에 불을 놓는 시뻘건 태양 때문에 아지랑이 너머 원두막이 두 개로 왔다 갔다 한다. 그 머리엔 잔뜩 까시래기가 얹혀 이른 나이에 벌써 삭은 노인네가 돼간다. 육천 도 끓는 가마 속처럼 바싹 구워지고 초벌구이가 된 몸과 잉걸불에 달구어져 타는 목마름은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 시원한 감로수를 축여도 칙칙 김을 내며 증발하는 물처럼 그때뿐이다. 막걸리에 쉰 김치 한 조각으로 허기진 배와 타는 목젖을 달래보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이글거린다. 골짝마다 갈라진 혓바닥으로 핥아대지만 폐경기 음부처럼 바싹 말라 있다. 가뭄에 논과 밭은 젖을 빨지 못한 사내의 육신에 살비듬만 버썩거리게 한다. 동만은 오늘도 골짝에 남은 습기를 찾아 삽질해 대지만 목마른 사내와 물 마른 여인의 샅처럼 먼지만 폴폴 날릴 뿐이었다. 낮에 마신 막걸리가 깰 때쯤 동만은 마을회관 노인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인들이 앉아 국수 내기 화투를 치고 있었다. 화투에 약한 이들은 옆에서 개평이나 얻고 있었다. 비록 점당 백 원짜리지만 점점 판이 흥미진진하게 무르익어가는 중이다. 동만은 심심하던 차에 옆에서 연신 입방아를 찧어대니 돈을 잃은 장 노인은 기어이 발끈 화를 낸다. “아따 그 주둥이 좀 다물어 이. 돈 잃고 기분 좋은 사람 없으니 께. 더 지껄이먼 확 기냥” “아따 형님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려 유? 겨우 국수 내기 험서” 동만은 슬슬 장 노인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서 상대방 노인에게 유리하게끔 도와주었다. “아따 형님 똥 먹으셔 똥. 똥 쌍피 가지고 뭐 하시유? 비 먹어유 이” 결국 장 노인은 아침에 며느리에게 얻은 용돈 삼천 원을 다 잃고 부아가 나서 동만을 노려본다. “야 이 놈의 자식, 빌어 묵을 자네 땜시 화투 베려 놨잖어? 이제 어쩔 거여?” “아따 형님도 으째 화살이 내게 돌아오는 겨어? 화투 치는 사람 마음이지 안 그렇시유?” “뭐가 어쩌구 어째? 남의 화투판 다 깽판 쳐놓고 그런 말이 나오는 겨 시방?” 싱크대에서는 국수를 삶을 물이 끓고 아주머니들은 김치와 양념을 준비하고 있다. 돈을 딴 노인은 슈퍼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사 오며 동만에게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마을회관에서 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운 동만은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태우며 슈퍼 앞을 지나가다 이장을 만났다. 이장은 자전거를 세워 둔 채 가게 안에서 점심으로 소주와 라면을 먹고 있었다. “어 이게 누구여 삼수 아니여? 이게 뭐여? 왜 집에서 밥 안 먹구 여기서 이러는 겨?” “말도 말어. 농민단체에서 이번에 서울에 상경 투쟁 한다구 난리두 아녀. 그래서 거기 돌아가는 소식도 들을 겸 댕겨 오다가 때를 놓쳐버렸어.” “뭐 헌다구 밥도 안 먹구 돌아 댕겨? 그런다구 누가 알아주남? 이장은 우리 마을 단속이나 잘 혀” “그려, 알었어. 이리 와서 막걸리나 한 잔 혀어” “난 오늘 온종일 막걸리네 헤헤” “올해는 나락 물 수매를 많이 해준다구 하네. 자네도 많이 준비해 둬어. 그리구 감 값도 괜찮더라니 께. 첫물에 바짝 많이 따서 출하 혀어 돈 되게” “그려 고마워어” 동만은 오늘따라 동네 노인들과 이장을 만나면서 그래도 고향 인심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와는 달리, 이야기와 먹는 인심만은 아직도 푸짐하고 마음도 푸근했다. 가게를 나와 반쯤 피우다 끈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양 볼따구가 오목해지도록 힘껏 빨아들인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먼 산을 바라본다. 저 산에 아버지가 있었다. 저 산에 가면 억새 더미 냄새에도 아버지가 있다. 가을 들판에서 까시래기 날리며 타작하던 냄새가 아버지가 누워계신 산에서 난다. 욕심 많은 아버지는 살아생전 그 냄새마저도 저 산에 데리고 갔다. 동만의 등에서도 아버지 냄새가 난다. 아버지의 소소한 욕심 같은 것이 그의 몸에서도 흘렀다. 그 몸에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어느덧 동만도 중년의 억새가 되어 쉰내 풍기던 아버지같이 한 개비 담배 연기에 청춘이 간다. 마을회관에서 마주친 장씨 영감님의 몸에도 아버지 냄새가 났다. 하회탈이 된 얼굴엔 잘 익은 웃음과 잘 익은 슬픔이 보인다. 소나무 고목 밑둥치 같은 허물어져 가는 육신을 이끌고 혼자 쓸쓸히 경로당을 지킨다. 말없이 엎드린 바위는 하고 싶은 말 다 뱉지 말고 아끼며 살라 한다. 아버지는 동만에게 그렇게 말씀 하신다. 동만은 억새밭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딸까닥거리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예산댁은 둘째 딸 정희와 단감 선별과 포장작업을 하고 있다. “엄니, 아부지는 또 어데 갔어? 맨날 술만 묵고 일은 안 혀? 엄마 혼자 일 다 한다 니 께” “그런 소리 하지 말어. 너거 아부지도 요새 속이 많이 상해서 그러는 거여. 너거 오빠가 공고 졸업하고 취업한다고 혀서 더 마음이 안 좋은 것 같더라구” “아부지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왜 그리 안 풀려유? 오빠는 그래도 학교에서 성적이 잘 나와 선상님들이 대학 가라구 난리라구 허던 디” “왜 아니여. 너네 아부지가 그래서 더 속이 상하신 것 같더라구” “엄마, 좀 힘 들어두 오빠는 대학 보내. 나는 졸업하면 바로 취업 할 겨.” “니는 그런 소릴랑 하지 말어으. 너거 아부지 들으면 속에 천불 날 겨.” 올해는 선별기에서 떨어지는 단감이 유난히도 크고 빛깔이 좋은 상품이 많이 나왔다. 예산댁은 감 농사라도 잘 돼서 자식들이 대학에 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너네 아부지도 참 불쌍한 사람이다. 성질이 좀 별나서 그렇지 인정도 많구 성실했는 디 죄라면 없는 게 죄지. 너네 삼촌이 사업인가 뭔가 허다가, 아부지가 중동에서 고생해서 벌어온 돈까지 다 떨어 먹구, 너네 아부지가 다 덮어썼던 겨” 예산댁과 정희가 멀리 산허리에 내려앉는 노을을 바라보는 그 시간에, 동만도 한 개비 담배 연기를 날리며 상념에 젖는다. 가을 햇볕은 벼를 황금으로 만들어 놓았다. 잘 익은 저녁놀, 그 아래 펼쳐진 노란 들판이 살 따갑도록 눈부시게 펼쳐진다.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었다. 동만의 얼굴은 잘 익은 대추가 되고 억새 대궁도 백발을 만들었다. 노을이 모든 것을 태우고 익혀도 벼를 이기지는 못했다. 노란 들판에 밀려 한쪽으로 벗어난 석양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저녁이 온다. 밀려나서 더 아픈 그 들녘을 따라 봉명 다방의 황금색 티코가 달린다. 황금 들녘에 비치는 조그만 티코 자동차가 황금 노을에 묻힌다. 봉명 다방의 그녀가 미치도록 아름답고 슬프다. 동만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오늘 밤 노란 불빛 아래에서 그녀와 눈앞이 노래지도록 놀고 싶었다. 상념에 젖어 있던 동만은, 지나가는 경운기의 굉음에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현수 아부지 뭐 하세유? 뭐 좋은 일 있나? 뭐 보구 그리 히죽히죽 웃으세유?” “아무것도 아녀어. 당신이 오늘따라 이뻐 보여서 그러는 거여.”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 하시유. 저 냥반이 오늘 왜 저러는 겨? 날아가는 참새 불알을 봤나?” 예산댁이 동만을 측은하게 바라보니 참 많이도 늙어 보인다. 백발과 시커멓게 그을린 이마엔 굵은 왕 주름이 일자로 그어져 있다. “당신도 참 많이 늙었소. 오늘따라 내 맘이 왜 이런지 모르겄네유.” 동만이 겸연쩍게 예산댁을 바라보니 그녀도 어느덧 신혼 때 고왔던 모습이 이젠 할머니가 다 돼 있었다. 길게 늘어진 저녁놀이 산 너머로 내려앉고 있다. 동만은 지금의 감 밭을 만들기까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어린 고사리 손으로 리어카를 밀며 현수와 정희가 따라온다. “현수야 많이 힘들지?” “아녀유, 아부지가 힘이 쎄서 잡아당기니 께 미는 거는 힘이 하나도 안 들어유”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 “저는 커서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유” “정희는 뭐가 될 겨어?” “아부지, 나는 크면 돈 많이 벌어서 엄니 아부지 외국 여행시켜 드릴 거예유” “오냐, 니들 말만 들어도 아부지는 기분이 엄청 좋네 이” 조막손으로 그 넓은 밭에 널린 돌멩이들을 주워 모아 리어카로 대 여섯 번씩 옮기고 나면, 산 너머로 길게 붉은 저녁놀이 내려앉았다. 길 위에서 길을 찾고 길 밖에서 길을 찾았지만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길처럼 보여도 그 끝은 언제나 막혀있거나 또 다른 갈림길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가는 것이 길이었고 길은 내가 만드는 것이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탄탄대로인 줄 알았던 그 길은 세상을 온통 혼란스럽게 하는 미로일 뿐, 내가 가는 길 아닌 길을 혹시라도 누군가 다시 걸어주고 밟아준다면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흑백의 제복을 입고 폼 잡는 까치가 험하게 뒤틀린 나무에 앉는다. 동만은 오늘 아침에 까치는 왜 끊임없이 머리를 끄덕거릴까 궁금해졌다. 비틀린 나뭇가지도 숨을 쉬는 모양인지 메마른 등껍질에 물이 올라있었다. 여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애태우며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까치는 힘내라고 격려하는 것 같았다. “그래, 살아있으면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닌, 살아있기 때문에 사는 게야” 살아야 하는 이유는 마른 세상을 위해 샘을 파야 하기 때문이다. 까치가 머리를 끄덕이는 건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기 위함이다 삼 년을 심고 가꾼 끝에 드디어 단감 밭에서 첫 수확을 얻었다. 초록의 물결 속에 노란 감들이 익어갈 때는 제주도 밀감 밭에 온 착각이 들었다. 그 감들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갈 때 동만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네 식구가 모두 매달려 첫 단감을 딸 때 사업실패 후 종적을 감췄던 동생 동수가 고향을 찾아왔다. “형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유? 못난 동생 때문에 형님하고 형수님이 이렇게 고생을 했네유. 죄송혀유… 정말 죄송혀유” “됐어, 그만 혀어. 그래두 이렇게 다시 고향에서 만나니 께 얼매나 반가워? 너도 그동안 고생 많이 했지? 너도 다 잘 살아볼려구 하다가 그리된 거 아녀어? 지난 일은 다 잊어 먹자구.” 그때 푸른 작업복 차림의 현수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얼굴이 상기된 표정으로 달려온다. “아부지, 아부지 기쁜 소식이예유. 엄마, 나 합격했시유” “그게 무슨 소리여? 합격이라니? 너 취직됐냐?” “그게 아녀유, 나 대학교 합격 했시유.” 동만은 그 소식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 기쁜 마음에 근심도 함께 들었다. 내심 현수가 대학교에 가길 원했지만 취업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합격했더라도 뒷바라지를 해 줄 형편이 못되니 마음이 언짢았다. “아부지, 걱정하지 말어유. 돈 한 푼 안 드는 대학교에 합격 했시유” “그게 뭔 소리여? 돈 한 푼 안 드는 대학교도 있어?” “국립철도대학교에 합격 했시유 철도대학교” 철도대학교는 국립으로 모든 게 국비로 지원되는 학교였다. 기숙사에서 숙식도 함께 해결된다고 했다. 예산댁이 너무 놀라 눈시울을 적시며 현수를 바라본다. “아이고, 우리 현수 장하고 고맙네. 엄마가 면목이 없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린 주홍빛 감들은 모두가 동만의 자식들이었다. 씨줄과 날줄처럼 뒤엉켰던 한여름 폭염과 장마가 물러가고 어느새 코끝에 스산한 바람이 야음을 틈탄 도둑처럼 밀려왔다. 삽다리 들판은 홍빛으로 물들고 어른 주먹보다 큰 첫물은 바리바리 싸서 서울로 보냈다. 하늘 아래 첫 단감을 따도, 최고로 수고한 농부는 볼품없는 파지 단감만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농부는 비록 파지 감을 먹어도 행복이 가득하다. 꽃가마 타고 저 멀리 사라지는, 제일 좋은 홍 빛 내 새끼들을 바라보는, 전지가위 쥔 손엔 불끈 힘이 들어간다. 도둑맞은 것처럼 가슴이 허전해도 한편으론 흐뭇한 게 농부들의 마음이었다. “형님, 동네 사람들한테 형님 이야기 많이 들었시유. 삽다리 근동에서 단감 농사를 제일 먼저 시작했다면서유. 처음엔 마을 사람들이 형님보고 미쳤다구 손가락질 혔다면서유.” “왜 아녀? 그래두 내가 성공을 허니까, 이제는 온 동네 사람들 내남없이 죄다 단감 농사한다구 난리도 아녀” “형님두 참 대단하세유. 인간사 새옹지마라 하더니만” “이제 현수는 한시름 덜었으니 께 우리 정희 대학 시킬 일만 남았네그려. 허허허” 누런 황금 들판과 홍 빛 감 밭에 짙은 노을이 내려온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올라온다. 하루 일을 마친 경운기들이 둥지를 찾아 들어오고 있었다. 막걸리 한 잔 노을 한 잔 마시고 두 뺨에도 붉은 놀이 솟는다. 기분 좋은 웃음이 넘치고 먼 능선을 보니 온통 시뻘건 불천지다 불이 붙는다. 대지가 헐떡일 땐 한바탕 소낙비가 제일이듯 목젖이 탈 때는 막걸리 한 잔이 최고다. 바싹 마른 나뭇잎이나 푸석한 사람들의 얼굴도 가을 들판에선 반짝거리는 금잔디가 된다. 동만은 오늘따라 들이키는 막걸리가 지리산 토종꿀 맛 같다. “정희 엄마, 내일은 고구마 밭 한번 뒤집자구.” “형님, 저는 그만 가볼게유. 조만간 또 오겠시유. 형수님하고 고기나 좀 사 드셔유” 자고 가라는 동만을 뿌리치고 서서히 내리는 어둠 속으로 동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동만은 억지로 동생이 호주머니에 찔러주고 간 신문지 뭉치를 펼쳐보니 지폐 다발이 나왔다. 모두 이천만 원이었다. 너무 맑아 시린 눈물 나는 하루, 반겨주는 이 없이 풍성하다 못해 겁나게 푸르른 감잎들을 본다. 가을, 또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붉은 홍시가 익어가도 아무도 쳐다보는 이 없는 시골 빈집, 적막한 시간 속에도 감나무는 홀로 이별하며 내년을 기약한다. 우듬지 끝에 매달린 외로운 감 하나는 희망을 물어올 까치를 기다린다. 이별과 이별의 시간 속에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 또한 삶의 일부분이다. 이별이 있기에 새로운 희망이 있는 것이다. 동만은 다시 찾아올 내일을 위해 나무처럼 볕 바라기를 한다.
현수는 오 년 만에 처음으로 좋은 인사고과를 받아서 연말에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았다. 부모님의 낡은 구두를 바꿔주려고 아내와 백화점에 갔다. 나선 김에 아내의 가을 옷도 한 벌 사 주려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사양했다. “자기야 그냥 시장에 가자.” 싫다는 아내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갔지만, 입구에서부터 구십도 인사하는 종업원들을 보니 어쩐지 인사받기가 어정쩡했다. 매장에 들어서니 또 구십도 인사, 한 발짝 떼면 또 인사를 한다. “자기야 그냥 시장에 가자” 현수에게 눈총을 주며 앞서가는 당당한 아내의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낡은 스웨터에 대충 걸친 멜빵이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다. “자기 겨울옷이나 한 벌 사자” “나는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못 사” 실랑이를 벌이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니 고개 숙인 채 걸레질하는 미화원이 지나간다. 출입문 지나 주차장엔 번쩍번쩍 광을 낸 중형차들이 지나간다. 백화점엔 삶에 지친 인생이 있고 삶을 즐기는 인생도 있었다 현수는 부모님들 구두만 사고 아내와 시장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이거 얼마예유?” “이만 원이예요.” “조금만 깎아 주시면 안 되유?” “그렇겐 안 되는데, 남는 것도 없시유.” “안 되는 게 어딨시유?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시유?” “그렇겐 안 되는데, 그럼 만칠 천원만 주세유.” 현수와 아내는 지갑에 돈이 있건 없건 시장인심이 더 좋았다. 시장에 가면 구십도 인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오랜만에 현수는 아내와 국밥집에서 막걸리를 한 잔 했다.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막걸리를 현수도 어릴 적부터 즐겨 마셨다. 가게에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면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맛을 익혔다. 현수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막걸리다. 가끔은 맥주나 소주 또는 양주, 정종 등 다양하게 맛을 보지만 일상적으로 즐기는 것은 막걸리였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그의 생긴 모습도 막걸리 타입이라고 한다. 아무리 이미지 관리를 하려고 해도 막걸리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하게 돼버렸다. 심심풀이로 음료수처럼 마시는 술이니 오죽하랴. 중학교 다닐 무렵엔, 본격적으로 숨어서 막걸리를 마셨고, 고등학생 때는 가끔 술로 인해 부모님의 속께나 썩였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동창들을 만나면 첫인사가 “야, 막걸리 온다.”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묻는 질문이 “요즘도 막걸리 많이 마시냐?”고 한다. 이제 좀 스타일 바꾸라고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성격이 좀 싹싹하지를 못하고 과묵한 편이어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지만, 한번 친해진 사람들은 참 오래 가는 편이다. 먼 훗날 노년의 꿈이 있다면 양지바른 언덕 위에 흙으로 집을 짓고, 커다란 항아리를 몇 개 장만해서 동이마다 갖가지 술을 담아놓고 싶었다. 친구들을 초대하여 밤새워 이야기를 하고 뜨끈한 아랫목에 몸 지진 후 아침에 해장국 한 그릇 대접하고 싶은 것이다. “나도 아부지를 닮았는지, 이 막걸리가 참 좋더라구” “이 일을 워쩐디야 촌사람 아니랄까 봐, 자기도 어찌 그리 막걸리를 좋아 혀어? 아버님 닮았나? 피는 못 속인다더니 그 아부지의 그 아들이여.” “한 잔 하고 얼른 가아. 엄니 아부지 기다리시겠다.” “누가 효자 아니랄까 봐 자기 부모는 그리 알뜰하게 챙기셔? 마누라도 그리 잘 챙겨 보셔” “올해는 감 농사가 잘됐다고 하더라구. 그게 다 우리 이쁜 마누라가 부모님한테 잘한 덕분 아니여? 고마워어.” 신작로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가슴 속까지 시원한 바람이 현수를 향해 불고 있었다.
▲예시원 : 작가·문학박사 〈월간문학〉 짬뽕 한 그릇, 〈한국소설〉 짬뽕 두 그릇 등단 / 소설집 『토영 통구미 아재』, 시집『누가 바다의 이름을 부르는가』, 수필집, 평론집 다수 발간 / 한용운문학상, 한국문학상, 박남수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수필가협회, 서울시인협회, 경남소설가협회, 경남시인협회 회원 /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계간『시와늪』주간·심사위원, 한국문학세상 심사위원, 문학춘하추동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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