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
이덕대
문명의 이기(利器)를 누리는 요즘 사람들이 자연환경에 버티고 싸우는 힘이 약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더울 때는 더운 대로 추울 때는 추운 대로 자연에 최대한 순응하여 사는 것이 건강에 좋을 듯도 싶다. 몸이 자연의 온도에 맞춰져야 면역체계도 정상작동하고 계절 변화에도 쉽게 적응할 것이라 판단하지만 정작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달리 바꿀 수도 피할 수도 없어 자연의 삶을 산 옛사람들 건강이나 수명을 생각해 보면 미상불 좋게만 생각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장치로 더위와 추위를 적당히 피해 사는 현대인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요즘이야 대부분 에어컨이며 냉장고에 더위와 능히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예전엔 선풍기는커녕 부채 하나 식구 수대로 가진 집이 별로 없었다. 여름이 다가오면 새나 꽃그림, 유명 배우나 가수 얼굴이 그려진 부채를 팔러 다니는 장사치도 있었다. 땀받이 대나무 등걸에 부채 하나면 더위 피할 준비가 끝났다. 소(沼)에 멱을 감고 나뭇그늘에서 쉬다 보면 여름은 쉬이 갔다. 어릴 적 가을 그림은 정겨웠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면서 밤마다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울었다. 어스름 저녁이면 뒤란 감나무 사이로 장수잠자리가 저공비행을 하며 날것을 사냥했다. 몽당 싸리비로 쫓았지만 한 번도 잡지 못했다. 추녀 아래 여기저기 거미가 집을 짓고 배고픈 사마귀는 겁 없이 앞발질을 해댔다.
문제는 아열대 기후로 변하면서 각종 채소류 파종시기 혼란과 농부 경험의 쓸모 없어짐이다. 기후 관측 사상 최고로 무더웠던 여름 탓인지 올해는 늦더위도 심하다. 늦더위는 계절적으로 가을인 입추 후의 더위다. 역서(曆書) 상으로는 가을이 되었어도 아직 남아 있는 더위를 늦더위라 한다. 늦더위가 한여름 더위 못지않다. 이웃집 양반은 농사를 업으로 한다. 밭일을 하다가 집으로 오는 길이라며 이마 땀을 훔친다. 올여름 길었던 장마와 무더위로 고추와 참깨 농사도 망쳤는데 김장용 채소마저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 한숨이다. 처서를 넘겨 심은 배추도 무도 때아닌 폭염 탓에 죄다 녹았다며 다시 씨를 뿌렸단다. 전에 없던 이상 고온 때문에 경험으로는 파종시기를 맞출 수 없다며 혀를 찬다. 고추잠자리 한가롭게 날고 박이 담장 위에 덩실 올라앉을 시기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늘을 찾는다. 늦더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늦더위가 드는 해는 콩도 튼실하고 쭉정이 벼도 적단다. 가을걷이를 기다리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을 농부들을 생각하면 이까짓 더위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늦더위가 수그러들면 짧지만 풍성한 가을이다. 자연의 순행은 어김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선선한 가을바람은 부지런한 농부의 채마 밭에 또 다른 기쁨을 채울 것이다. 자연은 부족함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법이다. 삶이 있어야 죽음이 있고 이것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는 장자(莊子)의 깊은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도 늦더위도 가을의 한 부분임을 새삼 알겠다. 예전엔 부채 하나로 무더위를 견뎠지만 각종 냉방 기기를 갖추고도 여름 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요즘 기후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을 다시 생각한다.
▲이덕대 *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 김포문학(2017) 및 한국수필(2021) 신인상 * 한국수필 2023 ‘올해의 좋은 수필10’ 선정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 수필집 출간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2023)> <내 마음 속 도서관(2024)> * 시인투데이 작품상(2024) <한통속 감자꽃> * 한국수필가협회 및 한국문인협회 김포지회 회원
<저작권자 ⓒ 시인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산문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