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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김치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8/13 [11:29]

열무김치 / 이덕대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4/08/13 [11:29]

열무김치

 

이덕대

 

 

  기억의 수장고를 열고 회한의 시간을 반추하는 것은 아문 상처를 덧낼 수도 있으나 그 자체가 오롯한 삶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긍정의 추억과 부정의 기억들은 똑같이 삶의 추동력이다. 아침 햇살은 가슴 뛰는 희망을 가져오지만 어스름 달빛이 만드는 이슬도 절망을 녹여내는데 보탬이 된다. 인간의 영혼을 정의하기 어렵지만 영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음식이 영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영혼의 음식이란 어떤 것일까. 치열한 삶을 이어오면서 현재의 자신이 있도록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영혼의 음식이란 고난의 음식이고 가난의 음식이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음식이다. 영혼(靈魂)이란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다.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끼고 사유하며 행동을 유발하는 자신의 주인이다. 그 영혼이 평생을 기억할 음식이란 본인의 삶이 녹아있는 인생 여정 그 자체다. 가난하던 시절 지겹게 느껴지기만 하던 음식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영혼의 음식으로 바뀌어가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어려웠던 시간의 강을 함께 건넌 음식들이 어느 순간 도반처럼 넌지시 때로는 갑자기 다가와 있는 것을 보면 삶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시간들의 직조(織造)임이 분명하다.

 

  오락가락하는 장마 끝에 폭염이 세상을 달군다. 몸도 마음도 흘부들하다. 아득한 세월의 우물에서 영혼을 씻어줄 기억을 찾아 떠난다. 도시락을 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부터 걱정이었다. 장마가 몰려왔다간 뒤 텃밭은 무참했다. 자갈돌이 드러나고 푸성귀는 자취도 없었다. 뜨거운 햇살에도 일찍 가을을 찾아 나선 고추잠자리 덕분에 파란 하늘은 점점 높아졌다. 질척거리며 고랑을 적시던 물길을 이기고 살아남은 파란 고추는 높아지는 하늘만큼이나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겹겹이 햇살을 막는 감나무 잎사귀 아래 호미로 골을 쳐 심은 열무들도 며칠간 내린 큰 비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풀들이 우거진 텃밭 가장자리에 버려진 듯 숨겨진 열무 몇 포기가 겨우 보였다. 약이라고는 구경도 못한 잎사귀는 구멍이 숭숭 나고 바랭이 풀과 경쟁한 탓에 멀대같이 웃자랐다. 어머니는 조심히 뽑고 가려 개울에서 정갈히 씻어 김치를 담갔다. 양념이라야 밥 물에 소금과 풋고추, 마늘을 다져 넣은 것이 전부지만 항아리에 담가 부뚜막에 두고 하루만 지나면 시큼하면서도 아삭한 것이 먹을만했다. 곤궁한 산골 부엌에서 열무김치를 담그는 마음은 밥상 앞에 둘러앉을 자식들 생각으로 흐뭇하기도 하고 허우룩하기도 했을 것이다.

 

  여름날 보리밥에 군내 나는 열무김치 한 종지와 같이 싸간 도시락은 아픔이었다. 도시락을 싼 보자기는 누에 영장 물처럼 김치 국물이 얼룩졌고 스멀스멀 번지는 김치 냄새에 읍내 학교 옆자리 아이는 자꾸만 코를 벌렁거렸다. 점심시간에는 교실 구석에서 숨듯이 혼자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영혼은 아팠고 어느 순간 열무김치는 영혼이 되어 몸속 깊이 스며들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알만한 나이가 되면서 이제는 여름만 되면 열무김치를 찾는다. 재래시장에서 재료를 구하고 손질하여 다듬는 아내는 더위 탓에 힘이 드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상처였던 열무김치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익기도 전에 먹기 바쁘다. 

 먹거리 귀하던 그 여름날 쉰내 풍기던 반찬 한 가지로 도시락을 싸가던 그때를 떠올린다. 폭염 속에서도 하늘이 점점 높아간다. 입맛이 바뀌어도 열무김치 맛은 변함이 없다.

 

 

 

 



 

 

▲이덕대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김포문학(2017) 및 한국수필(2021) 신인상

한국수필 2023 ‘올해의 좋은 수필10’ 선정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수필집 출간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2023)>

  <내 마음 속 도서관(2024)>

시인투데이 작품상(2024)

  <한통속 감자꽃>

한국수필가협회 및 한국문인협회 김포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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