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산책길에서
이덕대
한여름 무더위가 어기차다. 걷는 길 이슬받이는 이름도 낯선 꽃들이 제각각 모양과 향기로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봄에만 꽃이 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금계며 데이지에 외래종 귀화 꽃들이 화려하다. 그들도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맨 먼저 들은 소리는 무슨 소리였을까. 낳아주신 어머니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였을까 아니면 자식을 낳았다는 만족감의 기쁜 소리였을까. 산고로 제대로 소리조차 못 내실 때 출산을 돕고 계시던 할머니의 웃음소리였을까. 정월 생인 탓에 차가운 돌 위에 약간 젖은 모시적삼을 올려놓고 단단한 나무 방망이로 두들길 때 만들어지던 다듬이질 소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차가운 겨울 아침에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는 극히 서정적이고 식물적이다. 이별과 만남, 죽음과 탄생, 방랑과 윤회의 중간쯤에서 서성이는 소리이자 서걱대는 대숲의 바람 소리다. 다듬이질 소리는 사라진 소리 중의 하나이지만 언제나 영혼을 깨우는 소리이자 평생 길에서 떠돌며 잠들지 못하는 방랑의 소리다. 탄생의 시간에 듣던 소리는 어울림의 소리였을 것이다.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진다. 사람들이 뛴다. 산책길이 소란하다. 자연의 위력은 폭력이 아니다. 비바람이나 눈보라는 자연 현상이다. 폭력이란 권력과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이나 식물의 생존에는 폭력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대 군락을 이루고 타 개체의 접근을 철저히 거부하며 그들만의 세상을 추구하기는 한다.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대단히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종족 유지 본능에 충실한 자연현상으로 타 개체들 삶의 영역 거부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 욕구의 충족 이상의 지배적 탐욕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이것은 분명 폭력적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인간을 대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월에 잘 씻긴 바위나 멋지게 키워낸 나무들, 생명을 이어온 땅이 여지없이 파헤쳐 지고 그 위에 인간을 위한 길이 만들어진다. 새롭게 만들어진 길로 인한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류도 알 수 없는 이름 모를 씨들을 뿌린다. 외국에서 마구 들여와 터잡게 된 수많은 귀화식물들이 이 땅을 점령하고 부조화의 세계를 만든다. 무차별적 조화의 파괴가 결국 생(生) 최초 순간에 들었던 다듬이질 소리마저 우리 삶에서 몰아낸다. 귀를 맑게 하는 빗소리가 아니라 길이 무너지는 폭력의 소리가 되어 정신적 미로를 만든다.
오로지 공기와 물 그리고 햇빛으로만 삶을 이어가는 자연의 생명 유지 방법을 생각한다. 탄생 순간의 다듬이질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려오는 폭우 속 산책길에서도 피고 지는 꽃들을 미추로 구분 짓지 않고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빗소리와 다듬이질 소리가 자연의 교향악으로 어우러지는 곳은 이제 없을까. 무자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사람도 자연이어야 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하나씩 둘씩 받아들일 수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나보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산사태로 귀한 생명이 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덕대 *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년~현재) *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년) * 한국수필 신인상(2021년) *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선”에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선정(2023년) *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출간
<저작권자 ⓒ 시인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산문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