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설
이덕대
큰길이 끝나면 골목길 접어드는 곳에 작은 꽃 가게가 있다. 도심의 꽃 가게는 지나가며 눈길만 주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정작 꽃을 사본 적은 거의 없지만 지날 때마다 내심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꽃집 주인은 중년의 여성이다. 흔한 행운목이며 재스민에 화려한 양란들을 철 따라 갈마들며 진열한다. 요즘은 앙증맞은 다육이들을 다보록하게 모아 놓았다. 진열된 꽃과 나무들은 언제나 엇비슷하다. 화분마다 이름과 가격표가 붙어있다. 경제사정이 어려우면 꽃집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힘들었던 시기에 이 집도 한동안 문을 닫았다. 바지런하면서도 덩치 탓인지 여낙낙해 보이는 주인은 매일 아침 화분을 손질하고 길거리에 면한 유리창을 열심히 닦는다. 오늘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철제로 만들어진 거치대에 화분이 한 개만 놓여있다. 거의 매일 지나다시피 하는 곳인데도 평소에 보지 못했던 눈처럼 하얀 꽃으로 뒤덮인 작은 화분이다. 아주머니가 물뿌리개로 넉넉히 물을 준다. 지인들을 만나러 나가는 길, 서둘러 지하철을 타야 할 일도 없고 궁금하기도 해서 말을 붙여본다. “무슨 꽃인데 그렇게 물을 많이 주세요?” 지나가는 듯한 말에도 관심이 고맙다는 듯 환한 표정으로 “백정화라고 지금 이때 꽃을 피우지요. 유월설이라 하기도 하고. 여름꽃이라 개화가 되면 물을 많이 줍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꽃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지만 가끔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학교 화단에 피던 꽃이 생각났다. 올해는 유난히 일찍 찾아온 폭염 탓에 도시의 골목이 많이 지친다. 마을에서 울타리로 심어지기도 했던 유월설이다.
이 푸르른 유월에 함박눈이 덮인 듯한 꽃이라니. 무심한 듯 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유월설 흰 꽃송이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끊어진 나라가 이리도 아픈 유월 아침에는 차라리 눈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뜬금없이 해본다. 붉은 피로 동강난 산하가 다시 하얀 눈으로 이어지고 순백의 자유가 한반도에 다시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날은 언제나 올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미칠 듯 마구 뛰던 그 심장은 이제 서로의 아픔에 반응하지 않는다. 같은 달이어도 사람마다 마음으로 느끼는 계절은 다르다. 동일한 현상을 두고 만들어지는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청춘의 날들 대부분을 군문에서 보낸 이들에게 유월은 특별하다. 잊히지 않는 기억들, 잊을 수 없는 날들은 유월에 많이 모여 있다. 푸른 유월의 하늘에 무심히 떠있는 달조차 마음속 애련이다. 핏발 선 눈으로 서로에게 삿대질하던 날들이 막 내린지 언젠데 화해와 공존은 더욱더 요원하다. 여름이 왔다고 눈처럼 하얀 꽃이 피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붉은 산 붉은 들에 내팽개쳐졌던 붉은 죽음을 기억할 이 이제 없다는 것은 너무 처연하다.
유년 시절 줄을 지어 호국영령이 잠들어있다는 현충탑을 참배하고 너 나 없이 애국 애족의 마음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핏대 선 목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모름지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과거를 보상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부탁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이들을 현양하는 것은 국가의 마땅한 도리다. 나라의 부름에 따라 이 땅을 지키다가 산화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아픔의 유월이 간다. 반평생을 군에서 봉직한 지인들과 나라 걱정하는 이야기를 나눈 후 유월설이 가져다준 상념이다.
▲이덕대 *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년~현재) *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년) * 한국수필 신인상(2021년) *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선”에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선정(2023년) *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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