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단상
이덕대
모든 나무에 잎이 돋는다는 여월(余月)은 푸르름이 넘친다. 지구 온난화로 창포 끓여 머리 감는 달이라던 포월(蒲月) 만큼이나 잎들이 성하다. 망종(芒種)을 지나더니 봄기운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하지가 며칠 남았는데도 폭염에 열대야까지 나타났더니 벌써 한여름 잠비가 내린다. 모두가 힘든 삶을 살았던 시절, 바로 이즘이 춘궁기였다. 보릿고개를 어렵게 넘던 시기다. 콩이나 밀을 서리하여 개울가나 방천에서 구워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때다.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일까. 촉촉이 비 내리는 날은 군것질 생각이 간절해진다. 집을 나서면 길거리마다 한식에 중식, 양식 등 식당이 넘쳐나 무엇을 먹을까 고민이다. 어느 사이 동남아 국가 음식들도 제법 자리를 잡았다. 피자에 햄버거며 초밥까지 집에 앉아서 시켜 먹는 배달 음식의 제한이 없다. 그래도 서민들에게 제일 만만한 간식거리는 라면이다. 프리미엄급이라며 몇 천 원을 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식재료에 비하면 아직 라면은 저렴하다. 지금 세계 먹거리 시장에서는 한국 라면이 대세다. 작년 한 해 수출액이 1조 3천억이었다고 한다. 가난의 강을 건너면서 우리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라면이 이제는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다.
라면이 처음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로 기억한다. 한 봉지에 10원이었던 라면에 대한 추억과 맛은 지금도 뇌의 레시피 저장고에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다. 꼬들꼬들한 면발에 약간 느끼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구수함은 물론 생경한 부드러움까지 더해진 라면은 이전에 먹던 국수와는 전혀 다른 밀가루 음식이었다. 지금이야 다양한 종류와 조리법이 개발되어 언제 어디서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당시는 신기하고 예사롭지 않았다. 라면은 세상에 나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 끼 식사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잘 사는 집 두레 새참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라면을 처음 만들기 시작한 모 식품회사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1960년 초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5원짜리 꿀꿀이죽 한 그릇을 사 먹고 자 길게 줄 선 사람들을 보고 식량 자급 문제를 위해 라면에 승부를 걸었다고 한다. 사관학교 생도 시절 라면에 대한 기억은 특별하다. 한 달 중 두 번의 토요일 점심은 라면이 나왔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끓이다 보니 가락국수 면발보다 굵은 불어 터진 라면이었지만 먹성 좋았던 청춘은 언제나 양이 모자라 배가 고팠다.
그때를 생각하며 지금도 가끔 라면을 먹는데 여러 가지 감정이 일어난다. 그 시절 한 그릇의 라면에서 느끼던 행복감, 한두 번의 젓가락질로 단숨에 라면이 사라지고 난 후의 허전함, 라면 수프를 남겼다가 밥 위에 뿌리고 비벼 먹던 그 황홀함까지. 그러나 요즘 라면을 먹는 것이 그때처럼 행복하지는 않다. 라면만이라도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양껏 끓여 먹을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위안과 과거의 가난했던 삶을 돌아보게 하여 음식 절제에는 도움이 된다. 이제 라면도 저가 싸구려 음식이 아니다. 유명 백화점 음식 코너에서는 만원 한 장을 훌쩍 뛰어넘는다. 기껏 계란을 넣어 먹던 라면에서 해산물이나 육류 같은 고급 고명이 추가된다. 가난의 시대가 가고 나니 서민들을 위로하던 라면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산 라면이 너무 매워 어린이에게 해가 될까 염려해 리콜 대상이 되었다더니 사실은 일부 북유럽 국가의 외국인 혐오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라면이 무슨 죄가 있을까. 여름비 내리는 날 한 그릇 라면이 데리고 온 이런저런 상념이다.
▲이덕대 *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공군대령 예편 * 경남일보 칼럼니스트(2018년~현재) * 김포문학상 수필부문 신인상(2017년) * 한국수필 신인상(2021년) * 한국수필 “올해의 좋은 수필 10선”에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선정(2023년) * 한국수필가 협회 및 김포문협 회원 * 에세이집 [감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자라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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