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 장시백
태식은 승용차를 타고 신록의 푸른 향기를 맡으며 안산의 수인로를 달리고 있었다. 맨날 시내에서 골목길만 다니다가 오랜만에 대로에 나온 것이다.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보고 싶은 사람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도 짬을 내기가 어려웠다. 안산시를 조금 벗어나 대로에서 우회전하여 수인로를 빠져나가면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가 나오고, 그 좁은 도로를 따라서 가다 보면 외딴집이 하나 있다. 태식은 그 집 앞마당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았다. 주변의 넓은 논에는 파릇파릇한 미나리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그 미나리 논에서는 부부가 다정하게 잡초를 뽑고 있었다. “형님!.” 태식은 크게 소리쳐 불렀다. 부부는 동시에 허리를 폈고, 춘상이 태식을 보자 소리치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이고, 동상님. 어째서 인자 온겨!” 춘상이 첨벙거리며 논에서 뛰다시피 나왔고, 춘상의 아내 금숙도 허둥지둥 뒤따라 나왔다. 춘상과 금숙이 태식의 손을 움켜잡았다. “연락두 읍씨, 어이구 어쩐댜. 여보, 얼른 가서 음식 좀 준비해봐. 뭐라도 시키던가.” 춘상은 너무 반가워하며 안절부절못하였고, 금숙은 허둥대며 주방으로 갔다. “형님, 주열이는?” “유치원갔지, 울아덜은.” “하하하, 그러고 보니 유치원에 갈 나이군요.”
약 3년 전에 태식은 심부를 센터를 운영했었다. 결혼 전에는 법무사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했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태식의 아내가 임신하자마자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제대로 아이를 낳고 키울 자신이 없었고 장래성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사업구상 중에 떠오른 생각이 심부름센터였다. 흥신소라고 불리는 심부름센터라는 직업을 뉴스나 범죄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던 태식은 그런 불법적이거나 범죄에 연루된 일은 하지 않기로 정하고 조그만 사무실을 얻었다. 지역신문과 인터넷에 광고하고 구인광고도 냈다. 함께 일할 직원이 한 명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광고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전화가 많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이 불법적인 일이었다. 바람을 피우고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 달라거나, 바람난 남편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의뢰가 특히 많았다. 간혹 단순한 심부름을 해달라는 일도 있었다.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가 왔다. 주소를 알려주고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약속했던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왔는데 일 년이 넘도록 취직을 못 했다고 했다. “아직 창창하게 젊은 이십 대 청년이 이런 일을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좀 더 알아보고 정상적인 회사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사장님, 일자리 알아보는 것도 이젠 지쳤습니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그럼 좋은 일자리를 계속 알아보면서 일을 하고, 좋은데 취직되면 언제든지 그만두세요.” 그 청년은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이름은 남정우라고 했으며 꽤 잘생겼고 성실해 보였다. 정우는 매일 출근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사무실에 나와서 청소를 하였고, 태식이 출근할 때까지는 책을 보고 있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나온 태식은 깔끔한 사무실과 책을 보고 있는 정우의 모습에 마음이 흡족했다. 그런데 일이 너무 적어서 종일 컴퓨터만 보다가 퇴근하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는데 정우의 월급을 주기도 빠듯했고, 태식은 사무실에서 번 돈은 거의 없었고 통장에 남아있던 돈도 거의 바닥을 보였다.
“일은 좀 어때?” 태식의 아내 소영이 볼록해진 배를 내밀며 물었다. “우리 예쁜 자기는 뱃속에 있는 아기나 잘 키우셔. 일은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 태식은 애써 근심을 숨기며 웃음을 보였다. “혹시 나쁜 일 하는 건 아니지? 자기를 믿기는 해도, 믿는 거랑 불안한 거랑은 별개인 것 같아. 태어날 우리의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다른 일을 찾아보면 안 될까?” “걱정 붙들어 매셔. 난 꼭 이 사업 성공할 거야. 앞으로는 고령화가 가속화 되고, 1인 가족이 점점 늘어나고, 최저임금이 올라가서 일손이 부족한 회사가 많아지면 심부름을 해주는 회사가 번창하게 되니 두고 보라고.” 태식은 큰소리를 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애를 썼다.
“사장님, 아침 일찍 전화가 와서 제가 받았는데, 어떤 남자분이 점심시간에 찾아오신다는데요.” “무슨 일이래?” “물어봤는데요, 사장님께 직접 말씀드린다고······.” 태식은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남자 손님이라면 바람피우는 마누라 뒷조사해달라는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일을 면전에서 못한다고 거절할 일도 걱정이었다. “사장님, 한번 하죠? 재밌을 거 같은데요.” 태식은 정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자 40대로 보이는 말끔한 신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태식은 마주앉아 사연을 들었고, 정우는 책상에 앉아서 안 듣는 척 듣고 있었다. 역시 바람피우는 마누라 뒷조사를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들어보니 예상보다 간단한 일이었고, 손님은 태식의 생각보다 높은 비용을 먼저 제시했다. 태식은 얼떨결에 그런다고 했고, 손님의 부인에 관한 정보를 모두 받아 적었으며, 착수금으로 비용의 반절을 받았다. 손님은 비밀만 잘 지켜주면 더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하며 사무실을 떠났다. “그것 보세요, 사장님. 일단 일은 받고 보시라니까요.” 정우의 말에 태식은 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밥 먹자.” 짜장면 두 그릇을 시키고 태식은 배달원이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우는 불안한 기색으로 태식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태식이 짜장면 한 젓가락을 들어 올리다가 다시 내려놓더니 정우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운 좋게 간단한 일이고, 네 맘대로 손님을 오라고 한 거니까, 너 혼자서 처리해. 그리고 다음부터는 어떤 일인지 전화상으로 꼭 물어보고, 이런 일이면 거절해. 할 수 있겠지?” 정우는 알았다고 했고, 며칠 후엔 그 일을 잘 처리했고 잔금도 직접 받아왔다. 태식은 정우의 그런 모습이 대견했으나, 지나치게 용감한 것이 다소 걱정되기도 했다.
태식의 아내 소영이 배가 많이 불렀다.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태식의 통장에는 돈이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정우의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것도 없이 생활비도 빠듯하게 살았다. 출산일이 다가오니 출산비용이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아기가 일찍 나올지도 모르니 병원비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형제나 친구들에게 빌려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였다.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한다며 집을 나섰다. 태식이 향한 곳은 사무실이 아니었다. 밤에 지역정보지에서 찾아보았던 불법 사채사무실이었다. 태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가, 결혼하기 전에 짧게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적도 없었다. 사채 100만 원을 빌리면 선이자 30만 원을 떼고, 한 달 후에 100만 원을 갚으면 된다고 했다. 태식은 엄청나게 비싼 이자라고 생각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고, 또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채를 빌려 손에 쥔 태식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불법 사채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즉시 편의점에서 콜라를 하나 사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불법 사채사무실에는 흉터와 문신으로 얼룩진 조폭 같은 놈들이 커피도 타주고 친절을 떨어댔으나 태식은 목이 타고 숨이 막혔었다. 태식이 사무실에 도착하자 정우가 유달리 반겼다. 이력서를 냈던 회사에서 면접이 있다며 가본다고 해서 빨리 가보라고 했다. 태식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밤새 못 잤던 잠이 쏟아진 것이었다. 전화벨이 울려 잠을 깬 태식은 통화를 하며 창밖을 보았다. 어두워진 것을 보니 퇴근해야 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듯했다. 전화기에서는 나이가 사십 내외로 추정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가 사는 곳은 부천이라며,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안산에 있는 시내에서 만날 수 있느냐고 했다. 태식은 그런다고 했고 안산시청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하고 시간을 약속했다. 그 여자는 커피숍에서 키 큰 여자를 보면 그게 자신이라고 알려주었다. 손님과의 통화를 마친 태식은 아내에게 전화해서 먹고 싶은 거 없느냐고 했더니 소영은 족발을 먹고 싶다고 했다. 태식은 족발을 포장 주문해서 가지고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에 정우에게 전화하여 손님을 만난다는 걸 알리고 태식은 약속장소로 갔다. 커피숍에서 잠깐 앉아있으니 엄청나게 키 큰 여자가 들어와서 두리번거렸다. 태식이 손을 들었고 그 여자가 다가와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앉은키도 유별나게 컸고 얼굴은 낯이 익은듯했다. 그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저를 아세요?” 드디어 생각이 났다. “농구 국가대표였던 그분 맞죠?” 그 여자는 한때 이름을 떨치던 국가대표 농구선수 유연숙이었다. 태식은 놀랍고도 궁금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진짜 전문가 맞죠?” 태식은 자신이 전문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전문가가 맞는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믿고 말씀드릴게요. 제발 제 동생을 좀 살려주세요.” 그녀의 표정은 절실해 보였고, 태식은 당황했다. 동생을 살려 달라고 하니, 누가 죽이려 한단 말인가? 죽었다면 또 어떻게 살린단 말인가?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 동생은 농사를 짓는데 삼십이 훌쩍 넘어서 몽골여자랑 결혼했어요. 그 몽골여자는 제 동생의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빼내어 도망갔어요. 그 후 제 동생은 다방에서 일하는 여자를 사귀어 결혼해서 아들도 낳고 한동안 잘 살았는데, 농사도 실패하고 사는 게 힘들다 보니 아기엄마가 돈을 벌어보겠다고 나간 데가 하필 전에 다니던 다방이었어요. 제 동생은 그걸 알고도 아기엄마를 믿었고 애도 있는 여자가 별일이야 있겠냐고 그냥 두었대요. 그런데 그 다방에 단골로 오는 손님이랑 바람이 난 거예요. 아기까지 데리고 집을 나갔는데 아무래도 그 남자랑 안산의 어디에서 사는 것 같아요. 누가 알까 창피해서 경찰에 신고도 못 하고 찾고 있어요. 아기엄마는 몰라도 아기는 꼭 찾아서 데려와야 해요. 제 동생은 아들이 보고 싶다며 일도 안 하고 맨날 술만 먹고, 이러다가는 곧 폐인이 되고 말 거예요. 제 동생이 너무 불쌍해요. 농사도 실패하고 결혼은 두 번이나, 게다가 사기에 아들까지 잃었으니, 걸핏하면 죽어버린다고 말해요. 제발 제 동생 좀 살려주세요. 제 조카만 찾으면 제 동생은 다시 힘을 내고 살 수 있을 거예요. 돈이야 제가 도와줘도 되지만 자식은 제가 만들어 줄 수도 없고, 그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겠어요. 사장님, 제발요. 여기 착수금 받으시고 제발 꼭 좀 찾아 주세요.” 그녀는 태식에게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벌려보니 어림잡아 오십 만원은 되어 보였다. 태식은 찾아보겠다고 했고, 찾으면 100만 원을 달라고 했고 못 찾아도 착수금은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태식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정우야, 밥 먹자.” 정우는 밥을 먹으며 사무실을 그만둔다고 했다. 면접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약국에 약을 납품하는 일이라고 했다. 월급날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채우고 나간다고 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좋은 일 하나 하고 나가라.” 태식은 그 사연을 정우에게 설명했고,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정우가 보람 있을 것 같다며 그 일 꼭 성공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날 태식과 정우는 유연숙에게 받은 주소를 들고 유연숙의 동생 집을 찾아갔다. 그의 이름은 유춘상이었고 안산 외곽에서 미나리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유춘상의 집은 허름한 구옥에 조립식 건물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건물은 방이 하나 딸린 창고였다. 주변에는 미나리를 재배하는 논이 있었는데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듯했다. “계세요?” 태식이 소리쳐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창고에 딸린 방의 문 앞에는 신발이 보였고 술병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정우가 다가가서 문을 열어 보았다. 문이 열리니 먼저 술병들이 보였고 말라붙은 찌개 냄비에, 그 옆으로 이불로 감싼 무엇이 있는데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정우가 들어가서 이불을 걷어냈다. “뭣이여!” “유춘상씨죠?” “그려, 누구여?” 유춘상은 눈을 찌푸려 뜨고 얼굴을 들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이발은 언제 했는지,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연인 같았다. 태식이 명함을 주며 누나의 부탁으로 찾아왔다고 말했다. 유춘상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우리 주열이, 울 아들 주열이 찾을 수 있슈?” “네, 저희가 도와드리려고 온 겁니다. 이제 술 좀 그만 드시고 힘을 내세요. 그래야 주열이가 와도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할 거 아닙니까?” 태식은 춘상에게 주열이와 주열이 엄마가 찍은 가장 최근의 사진을 여러 장 달라고 했고, 춘상은 사진을 찾아 건네고 그동안의 사연을 자세히 얘기했다. 정우가 귀 기울여 듣더니 춘상에게 물었다. “혹시 주열이 엄마 금숙씨가 일했다는 다방이 어딘지 아세요?” “알지유, 내가 그 다방에 가서 맨날 우리 주열이 엄마 찾아내라고 했는대유. 그런데 거기 오겠어유? 이제 안오쥬.” 정우는 그 다방 외에도 금숙이 일했던 곳을 알려달라고 했고, 춘상은 금숙이 춘상을 만나기 전에도 다른 다방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그 다방이름을 기억해 냈다. “거기 내가 안산에 처음 왔을 때 맨날 다니던 길이라 기억이 나유.” 태식과 정우는 춘상의 말 중에 중요한 사항을 모두 받아 적었고, 찾아보면서 특별한 일이 생기면 연락할 테니 전화를 잘 받으라고 했다. 춘상은 간절한 눈빛으로 태식과 정우를 배웅했다. “사장님, 주열이 엄마는 몰라도 그놈은 반드시 그 다방에 나타납니다. 잠복해야 합니다.” “언제 나타날 줄 알고.” “제 생각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긴 해. 그런데 그놈 얼굴을 모르잖아.” “아! 사장님, 다시 가봐요.” 태식과 정우는 다시 춘상의 집으로 갔다. “왜 또 왔슈?” “집에서 주열이 엄마가 컴퓨터를 자주 쓰던가요?” 정우가 묻자 춘상은 그렇다고 했다. 컴퓨터를 켜 보았다. 컴퓨터는 깨끗했다. 흔적을 일부러 지운 것 같았다. “컴퓨터 본체를 좀 가져가도 될까요?” 정우가 묻자 춘상은 가져가라고 했고 컴퓨터를 정우가 들고 나왔다. 차 안에서 태식이 정우에게 컴퓨터는 뭐 하려고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복구해야죠.” “어떻게?” “제가 좀 할 줄 압니다. 사진을 복구하면 분명히 그놈의 사진이 나올 겁니다.” “이놈, 제법인데.” 태식과 정우는 차를 타고 가며 대책을 논의했고, 컴퓨터에서 사진이 나오면 바로 잠복을 하기로 했다. 금숙이 남자를 만났다는 다방은 태식이 맡았고, 정우는 금숙이 처음 일했었던 다방을 맡기로 얘기하고 둘은 퇴근했다. “사진 나왔냐?” 다음날 아침 태식은 정우를 보자마자 물었다. “제가 누굽니까! 이놈이 틀림없어요.” 정우는 컴퓨터에서 복구한 사진을 인쇄까지 해서 가져왔다. 사진은 여러 장이었고 둘은 인쇄한 사진을 나누어 가졌다. “이놈, 젊은 놈이네. 나랑 비슷하겠는걸.” 태식은 그놈이 한심한 듯 혀를 끌끌 찼다. 태식과 정우는 매일 오전엔 사무실에서 잠깐 만나고 잠복할 장소로 갔다. 무모한 생각도 들었으나 달리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정우는 왠지 꼭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났다. 정우가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날도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태식은 사채가 걱정이었다. 사채를 갚아야 하는 날과 태식의 아내 소영이 출산을 하는 때가 거의 비슷할 것 같았다. 태식이 다방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근심하고 있을 때였다. 태식의 전화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대출 상환일이 다음 달 5일입니다만, 특별한 사정으로 이달 20일까지 상환하여 주십시오. 안 그러면 특별조치 들어갑니다.- 태식은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 따졌다. “이봐요. 당신 알아보니까 어차피 시간 더 줘도 못 갚아. 그러니 딴 데 빌려서라도 빨리 갚아.” 사채사무실의 조폭 같은 놈이 자기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태식은 두려웠다. 이달 20일이라면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태식은 골목에 서서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일주일 안에 주열이를 찾아서 돈을 받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 특별조치란 게 뭔지 몰라도 소름이 돋았다. 정우는 다방을 마주 볼 수 있는 공원 의자에 앉아서 다방 앞을 지나가는 남자들과 다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사진을 대조하며 지켜보았다. 점심때가 되니 배가 고파서 근처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다가 먹고 있었다. 김밥을 먹으면서도 시선은 계속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했다. 김밥 포장지를 버리기 위해 다방 입구 휴지통을 향하는데 다방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우는 그 남자의 얼굴을 살피더니 슬며시 돌아서서 사진의 얼굴과 비교했다. 맞는 것 같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남자를 따라갔다. 그 남자는 좁은 골목을 세 번을 꺾어져서 걸어가더니 파란색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우가 대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루가 있는 구옥이었는데 마루에서 놀던 아이가 그 남자에게 안기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됐다.” 정우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 집을 벗어났다. 그리고 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찾았어요.” “정말?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태식은 서둘러 정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태식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디냐?” “이 골목으로 들어가서 몇 번 꺾어지면 파란 대문집이 나와요.” “누구누구 있냐?” “아이가 있는데 그 애가 주열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서너 살 정도 돼 보이는데 아이 얼굴은 제대로 못 봤어요.” “그렇다면 맞을 거야. 수고했다.” “이제 어떡하죠?” “일단 유춘상 씨를 만나서 상의해 보자.” 태식은 정우와 함께 파란 대문이 있는 집을 확인하고 유춘상의 집으로 가서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춘상이 의견을 제시했다. 주열이가 마루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면 그런 기회를 봐야 한다고 했다. 일단 주열이만 빼앗아 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태식이 그렇게 하자고 했고, 그다음의 일은 상황에 따라 행동하자고 했다. 그러는 동안 날은 저물었고 춘상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셋은 안산의 수인로 대로변에 있는 식당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먹었고, 다음 날 아침에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셋은 태식의 사무실에서 만나서 논의하고 바로 정우가 잠복했던 다방 근처로 갔다. 먼저 정우가 파란 대문집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태식과 춘상은 다방 근처의 공원 주차장에서 차 안에 앉아 기다렸다. 정우는 파란 대문집 앞의 골목을 느린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며 집안의 상황을 살폈다. 드디어 대문이 열리더니 그 남자가 나왔다. 정우는 태연한척하며 그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 남자는 그 다방에서 한 블록 떨어진 건물의 당구장으로 들어갔다. 정우가 공원 주차장으로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춘상이 의견을 제시했다. 태식과 정우가 당구장에 들어가서 당구를 치는척하며 그 남자의 동태를 살피는 동안 춘상이 가서 아이를 빼앗아 오겠다는 것이다. “그럽시다. 그리고 여기 다방으로 불러 담판을 짓는 겁니다.” “그려유, 지가 남편이고 애 아부진대 뭐가 두려워유! 그렇게 해유.” 둘은 당구장으로 들어갔다. 그 남자는 당구장의 사장인 듯 계산대에 앉아서 공을 닦다가 태식과 정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인사를 했다. 둘은 태연하게 공을 달라고 하여 당구를 쳤다. 춘상은 정우가 알려준 곳으로 가서 파란색 대문이 있는 집을 찾았다. 다행히 대문은 잠기지 않은 채로 약간 열려 있었다. 그 열린 틈으로 집안의 마루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아이가 나와서 마루에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춘상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춘상은 손등으로 눈물을 한번 훔쳐내더니 대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대문소리에 놀란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소리쳤다. “엄마, 아빠······.” 춘상은 순식간에 아이를 들쳐 안았고 방문이 열리더니 금숙이 놀라며 뛰쳐나와 춘상과 두 눈이 마주쳤다. “나쁜 년!” 춘상은 한마디를 내뱉고 돌아서서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금숙이 ‘주열아’하고 외치며 그 뒤를 쫓아서 뛰어나갔다. 춘상은 금숙이 다방 근처까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다방으로 들어갔다. 금숙은 걸음을 한번 멈칫하더니 따라 들어갔다. 춘상은 다방의 구석 자리에 주열이를 꼭 껴안은 채로 앉아서 헉헉거렸다. 금숙이 다방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춘상을 마주 보고 숨을 고르며 서 있다. 춘상이 금숙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말했다. “당구장에 있는 놈 당장 오라구 혀.” 금숙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전화기를 받아들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당구장 사장이 다방으로 들어와서 춘상을 마주 보고 앉았고, 태식과 정우도 따라 들어와서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다. 태식이 당구장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는 모두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말 안 해도 알 테고, 당구장 사장님께서 말씀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 모두가 당구장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요?” “여기 두 동상덜은 내 후밴데, 형사여. 내가 일부러 불른겨. 죄 지은 게 있으니께 쫌 그러컷네.” 춘상은 이 상황을 이미 예측했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를 보고 말했다. “남 형사! 가자고. 세 분이 잘 얘기 나누시고.” 태식이 당구장 주인을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잘 생각하슈. 잘못되면 다시 보게 될 거요.” 태식과 정우는 다방을 나왔다. “사장님, 정말 그냥 가게요?” “그럼, 더는 우리가 할 일은 없어.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자.”
그날 저녁때쯤 태식의 계좌에는 200만 원이 들어왔고 보낸 사람은 ‘유연숙’이라고 되어있었다. 태식은 그 즉시 사채업자의 빚을 갚았다. 그리고 며칠 후 태식의 아내 소영이 출산을 했고, 정우도 좋은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태식은 예쁜 딸을 낳았다. 백일잔치에는 정우와 춘상, 그리고 유연숙도 다녀갔으며, 그날 춘상은 태식을 세상에서 하나뿐인 ‘동상’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춘상은 아내 금숙과 함께 미나리농사에 전념하여 그다음 해에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태식은 심부름센터를 운영했던 사무실을 분식점으로 고쳤고 음식배달도 하면서 열심히 일하며 바쁘게 살았다.
“들어오세요.” 금숙이 소리쳤다. 춘상과 태식이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먹던 음식에 보쌈 하나 시켰어요. 적으면 다른 거 또 시키면 되니까 많이 드세요.” “그려 동상, 여기서 저녁까지 먹고 오늘은 여기서 자는 겨. 여기 미나리 좀 먹어봐.” 태식은 미나리향을 좋아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앞마당을 파서 미나리꽝을 만들어 키웠던 미나리가 생각났다. 그날 먹은 미나리도 그렇게 향이 진하고 맛있었다. (끝) - 2018년 <소설미학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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