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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로키에서 피어나는 디아스포라의 노래 / 신금재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1/06/06 [12:59]

[단편소설] 로키에서 피어나는 디아스포라의 노래 / 신금재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1/06/06 [12:59]

 로키에서 피어나는 디아스포라의 노래

 

  코로나 바이러스로 2021년 봄은 더디게 오는 것 같다.

  그래도 동네 산책로 건너편에 보이는 로키 만년설은 엊그제 내린 봄눈으로 더욱 흰 빛을 발하고 높아진 하늘에는 돌아오는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간다.

 뒷마당 양지쪽에는 가을에 떨어진 파 씨앗이 어느 덧 초록 싹을 틔우고 봄비에 젖은 말간 얼굴로 인사를 보낸다.

 

“나를 보고 희망의 기운을 내세요.” 하는 표정으로 푸른 웃음을 전해준다.

 

얼어붙은 겨울의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저 여린 싹의 힘찬 에너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정든 대한민국을 떠나 미지의 꿈을 안고 캐나다로 왔던 그 긴 여정의 나날을 돌아본다.

 2001년 2월 중순, 김포공항에는 때 아닌 폭설이 내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를 망설이는 우리 가족 네 명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예정된 비행기는 출발 지연 안내 방송을 몇 번 반복하더니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전세 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민 가방을 다시 둘러메고 친구네 집으로 향하였다.

 며칠간의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김포공항으로 가서 우리는 밴쿠버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모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캘거리. 사실 캘거리라는 도시는 서울 올림픽을 하던 해에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는 것과 인터넷에서 조사한 바로는 석유 경기 붐으로 취직자리가 많다는 두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가 살 도시로 결정하게 되었다.

 남편 말대로 우리는 맨 땅에 헤딩하였다고 하듯이, 이민 자료 두꺼운 파일을 준비하긴 하였지만 이민 오기 전 캐나다에 답사 한 번도 오지 않았었다.

 밴쿠버 공항에서는 안내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멍한 정신으로 못 알아들어 비행기를 몇 대 놓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캘거리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밴쿠버까지 타고 온 비행기는 점보 비행기로 내부가 아주 컸는데 캘거리 행 비행기는 소형으로 앉는 자리가 두 줄 정도 되었다. 창밖으로 눈 덮인 로키의 풍경이 보였다. 우리는 정말로 로키가 보인다는 캘거리로 가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캘거리 공항에 도착하면 캐나다 정부에서 발행하고 필리핀 이민 사무소에서 발급 받은 서류(landing paper)가 영주권으로 변경된다는 그것 뿐.

 옆자리에는 런던으로 간다는 한국인 이민가족이 앉아있었다.

 “런던은 유럽이 아닌가요?” 하고 묻자 캐나다 동부에 런던이라는 도시가 있다고 하였다. 나중에 살면서 보니 캐나다 안에는 유럽과 닮은 지명이나 도시 이름이 꽤 많았다. 유럽에서 온 이주자들은 그곳이 그리워서 그랬을까. 

드디어 캘거리 공항. 트랩에서 내리는 데 날카로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마치 코를 베는 듯 강한 느낌이 전해졌다. 겨울 내복 몇 벌을 준비해온 생각이 들어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은 밴쿠버 사람들이 왜 캘거리를 칼가리라고 놀리듯이 부르는지 잘 알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다. 칼바람이 불어서란다.

 우리를 맞아주시던 지인 가족은 초저녁부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나타난 우리 가족을 그래도 고생 많았다며 어깨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면서 집으로 데려가 주었다.

 싱싱한 야채와 생선을 곁들인 덮밥을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게눈 감추듯이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난다.

 IMF, 그 이름도 유명한 것, 남편은 대기업 엔지니어였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우는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고 두 번째가 그때였다. 장남이던 그는 세 명의 동생들을 대학공부 시키고 동생들 분가를 차례로 시켰다.

 가난한 장남 특유의 성실함으로 묵묵하게 회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IMF는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조용히 찾아왔다.

 몇날 며칠 평생 몸담았던 직장에서 잘려진 고통을 몸으로 마음으로 울부짖더니 얼마 지나서 엔지니어 친구들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캐사모, 캐나다를 사랑하는 모임이라고 하였다. 때마침 캐나다 정부에서는 독립이민이라는 이름으로 엔지니어들을 모집한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였고 두 아이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인천교구 합창단-안젤리 깐딴띠-에 출석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그 엄청난 사실보다 합창단 친구들을 떠나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였다.

 합창단에서는 특별히 고별공연을 열어주어 두 아이를 위로해주고 우리 부부는 그동안 함께 하던 친구 모임, 부부 모임 등에서 열어주는 송별회를 미처 다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캐사모에서 알았던 한 친구가 얻어준 랜트 하우스(rent house)는 캘거리 북서쪽 달하우지 역 근처에 있었다. 한 달에 팔백 불 정도를 냈는데 먼저 살던 중국 사람이 청소를 대충하고 떠났는지 날씨가 더우면 카페트 바닥에 발바닥이 들러붙는 느낌이 들곤 하였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지하실에 세탁기가 있어서 내려갈 때 마다 여러 번 넘어 질 뻔하였다. 전등도 없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았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 갈 때마다 새 집을 사게 되면 햇볕이 잘 들어와서 내부가 밝은 집을 사리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하곤 하였다.

 첫 일주일 후, 장거리 비행기 여행에 지치고 정부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SIN 카드, 의료 보험 등을 만들고 나서 나는 심한 몸살로 쓰러졌다. 처음 찾아간 병원에서는 맹장염 같다고 하여 앰뷸런스를 불러 큰 병원으로 갔더니 장염증이라고 하였다. 

면역력이 많이 떨어졌었나 보다. 겨우 항생제를 구해먹고 며칠을 누워서 쉬는 동안 현관문에 꽂힌 동네 잡지를 보게 되었다. 

DAY CARE에서 교사를 구합니다. 배우면서 일할 수 있습니다.

 배우면서 일할 수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전화를 걸었다. 건너편에서는 사람의 대답 대신 응답기가 말하였다. 

네, 저는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였습니다. 캐나다에 온 지는 이 주, 15일 되었습니다. 매거진 광고를 보고 전화 드립니다. 메시지 들으시면 전화주기 바랍니다. 

얼마 후 오너라는 할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지금 인터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스, 대답을 하고 공항으로 우리를 마중 나왔던 친구에게 부탁하여 함께 갔다. 뮤리어라는 할머니는 이것저것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레쥐메(resume)이력서를 써서 내일 아침에 오라고 하였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친구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래도 와이프가 먼저 취직하겠네요.”

 

우리는 누가 먼저면 어때,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력서를 어떻게 쓰는 줄 몰라서 친구에게 물어물어 겨우 만들었다. 캐나다 이력서에는 사진도 안 붙이고 생일도 안 쓰고 부동산 내역은 더더욱 안 쓰는 우리가 써오던 이력서와는 많이 달랐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찾아갔다. 할머니는 물었다.

 

“오늘부터 일 할 수 있겠어요?”

 

“네, 그럼요.”

 

제일 먼저 한 일은 데이케어 현관문 유리를 신문지에 물을 묻혀 닦는 일이었다. 

데이케어에는 중동 사람 미리암, 러시아 미녀 알리사, 캄보디아 여인과 몇 명의 캐네디언 처녀들로 다민족 기업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영어로 번역해 온 교사 자격증과 교육청에서 발행한 경력 증명서를 보여주었고 다행히 이그젬션(면제)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영어 성적도 좋았고 이민 오기 전에 선교사들이 하는 영어교실에도 다녀서 영어는 좀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몇 달 근무하다가 각 나라 사람들의 프로난세이션(pronansation)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미스언더스탠딩(misunderstanding)으로 상대방의 물음에 엉뚱한 행동을 하는 나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정식으로 영어 학교에서 배우고 싶은 갈망이 생겨났다. 

다행히 칼리지에서 5월부터 성인을 위한 ESL 교실에 갈 수 있는 테스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배치고사를 보아 중간 등급 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뮤리어 할머니에게 영어를 배우러 가게 되어 출근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자 할머니는 수업이 몇 시에 끝나는지 차를 갖고 데리러 갈 테니 영어수업 마치면 오후에라도 와서 저녁 시간 클로즈(close)을 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나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전철로 갈아타고 다운타운 학교에 가서 2시까지 수업을 받고 다시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데이케어로 가서 저녁까지 청소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집으로 왔다. 

저녁을 마친 후에는 매일 저널 쓰기 숙제를 하였다. 3학기를 받아 5월부터 12월까지 공부하는 동안 제일 마지막 반, 폴란드 출신 ESL선생님은 마치 스파르타 군인처럼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켰다. 다행히 영어 실력이 눈에 뜨이게 나아져갔다. 

그즈음 러시아 미녀 알리샤가 좋은 정보를 내게 전해주었다. 

“애나,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였으면 주정부에 신청(apply) 해봐요. 캐나다 교사 자격증으로 교환해준대요.”

 

“정말”

 

주정부 사무실에 서류를 보내고 기다리기를 몇 달, 7월 초 캘거리의 세계 최대 축제인 스탬피드(stampede)가 열기를 띠던 어느 여름날 우체통에 꽂힌 누런 서류봉투를 발견하였다. 사자 두 마리 그림이 선명한 주정부 교사 자격증이었다. 

서류를 품에 안고 식탁 의자에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자격증 서류가 오지 않아 거의 포기하고 다시 유아교육 공부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아들이 놀라서 오더니 나를 안아주었다. 

“엄마, 축하드려요. 잘 되었네요.” 

때마침 중동에서 온 미리암이 내게 부탁을 하였다.

 “애나, 네가 다니는 그 칼리지에 가면 직업 안내판(job posting board)이 있다던데 내 자리 좀 구해줘요” 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건물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벽 빼곡하게 종이들이 붙어있었다. 

앗, 그런데 미리암 갈 자리도 있고 나에게 딱 맞는 자리도 있었다. 

그동안 주정부에서 받은 서류와 캘거리 시청에서 받은 서류 등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에 들어맞는 자리였다.

 데이케어 레벨 3 그리고 방과전후 프로그램 교사 등 

전화를 걸어 위치 확인을 해보니 세상에 이런 일이다. 바로 칼리지 로비 옆에 있는 데이케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이 두 배로 달라졌다. 

페이도 두 배, 베니핏(benefit)도 두 배, 교사들도 거의 캐네디언들로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여 알아듣기 훨씬 좋아졌다.

그때 알았다. 영어 발음은 정통으로 할 때 알아듣기 훨씬 쉽다는 것을 영어가 각국 나라 고유의 발음과 섞이면 이상해져서 알아듣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이때부터는 작은 수첩을 목에 걸고 다녔다. 상대방이 영어로 말할 때 못 알아듣는 단어가 나오면 물어보기도 하고 꼭 적었다가 시간이 나면 사전을 찾아보았다. 

그때 쓰던 작은 사전, 이제는 나달나달 떨어져서 사전의 기능을 잃었지만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던 수호천사였다. 

찾은 단어에 밑줄을 그어놓기를 여러 번, 여러 색으로 몇 번씩이나 찾아보고 또 찾아보고 마침내 내 언어가 되는 날은 얼마나 기뻤던가. 

칼리지 빌딩 안에 있던 데이케어에는 큰 놀이터가 있었다. 각 교실의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놀았는데 어느 날 유난히 눈에 뜨이는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마치 서울에서 온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얀 원피스에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끈 달린 구두를 신고 있던 아이였다. 

그 반 교사에게 물으니 원주민(first nation)이고 이름은 윈터(winter)라고 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인디언 소녀였다. 칼리지에는 싱글 맘을 위한 간호 보조사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의 100% 취직이 된다고 하였다. 왠지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그 젊은 엄마와도 대화를 나누며 친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무거운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이제 얼마 후면 인디언 레저베이션(reservation) 마을을 떠나 독립한다고 하였다. 가끔 뉴스에서 보면 독립하여 정부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인디언들을 보기도 한다. 

인디언 마을에 머물면 매달 정부에서 지원금을 주는데 그 마을을 떠나면 지원이 끊긴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용감한 선택에 마음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두 모녀의 삶이 인디언 마을에서 겨울 같았다면 자유로운 도시로 나와서 그녀들의 봄을 찾아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리가 흔히 거리에서 만나는 홈리스(homeless)들 중에는 인디언들이 유난히 많다. 처음에는 왜 저럴까, 우리 보다 영어도 잘하는데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신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잡 인터뷰(job interview) 할 때 들었다. 홈리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매니저의 질문을 듣고 어려운 사람들이니 도와주어야겠지요, 하며 속마음을 숨긴 채 대답하였더니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맨탈 프로브럼(mental problem)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다. 

 

캐나다 정부는 인디언들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는 듯이 보였다. 뉴스에서 보면 지난 과거에 인디언 학교에서 자행된 성 폭력이라든지 인디언 아기들을 강제로 입양 보냈던 부끄러운 일에 대하여 많은 보상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동네 강 건너편에 있는 인디언 레저베이션 마을, 쑤티나 마을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심정은 왜 저렇게 가두어놓고 사육하는 듯이 정책을 펼치는 걸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얼마 전 캘거리 시에서는 외곽순환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인디언 추장과 보상금에 대하여 담판을 하였고 결과는 성공적으로 이어져서 카지노 건물 옆으로 인디언 들판을 가로지르는 대형 교각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칼리지 데이케어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한국에서 동생이 전해준 어머니의 비보를 들었다. 외동딸로 두 동생을 보살피다가 결혼해서는 가난한 장남, 맏며느리로 산다고 바빠서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리지도 못하였다. 

또 남편 뜻으로 이민 간다고 하였을 때 전화기 너머 우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늘 귓가에 맴돈다. 

서둘러 떠난 공항에서 만난 어느 신부님이 옆자리에 앉으셔서 평생 고백성사를 해주시고 어머니가 계신 영안실까지 가셔서 입관 예절과 마지막 기도를 해주셨다. 

천주교 묘지에 먼저 가서 누워계신 아버지 옆에 어머니를 모시고 캘거리로 돌아왔는데 매니저가 불렀다.

 “애나, 다른 지점 석유 회사 데이케어 센터에 좋은 포지션이 나왔는데 가볼래요?” 하고 물었다. 

내가 근무하던 그룹은 캘거리 전역에 열 개가 넘는 센터가 있었고 넌프로핏( non profit)이라는 이름으로 교사들 복지가 잘되어있고 이윤이 남으면 교사들에게 휴가도 주고 보너스도 주는 나름대로 혜택이 좋은 곳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칼리지 안에 있던 데이케어에서 다운타운 석유회사 높은 빌딩 3층에 있는 데이케어로 옮겨가게 되었다. 한국인은 물론 아시안 조차 한 명 없는 일터였지만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유아교육 전공자는 그때만 하여도 주정부에서 적당한 서류만 갖추면 최고 급수인 레벨 3 자격증을 주었으므로 주변에서 묻는 사람들에게 데이케어 센터를 소개하여 주기도 하고 몇 년 후에는 우리 센터에도 한국인이 와서 영주권까지 받는 기쁜 일이 있기도 하였다. 

우리가 사는 앨버타 주에는 북쪽 마을 포트맥머리라는 곳에서 석유가 나온다. 모래 속에서 나오는 샌드 오일(sand oil--모래 속에서 나오는 석유)이라서 가공 비용이 좀 들기는 하여도 유가가 비쌀 때에는 그래도 미국 정유소로 보내서 앨버타 주정부 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때는 주정부 흑자가 났다고 주민들 모두에게 사백 불을 준적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시어머니를 포함하여 총액 천육백 불을 받았다. 요즈음은 차라리 그때 그 돈 받지 말고 이렇게 유가 폭락으로 고생하는 주정부에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캘거리 다운타운에는 여러 석유 회사 본사들이 하늘로 쭉쭉 뻗어 스카이라인을 멋지게 만들어 주었다. 

석유회사 건물 안에는 본사 사무실도 있지만 그에 따른 변호사 사무실, 회계사 사무실 등이 있어서 데이케어에 오는 아이들 부모님들은 거의 대부분 상류층 엘리트였다. 

석유 회사 데이케어는 칼리지 데이케어에 오던 직업학교 싱글 맘들과는 차원이 틀려서 캐나다 상류층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변호사였던 어느 부모님은 아침 일찍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와서 아이를 내려놓고는 마주 서서 키스를 하곤 하였다. 애정 표현도 서슴지 않았던 그 부부는 몇 년 후 이혼 여행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였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공항에 간다고 하면서 아이를 데리러 평소보다 일찍 왔다. 여동생이 한국에서 영어 교사를 하다가 오늘 돌아온다고 하였다. 

“나도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영어 교사를 한 적 있어요.” 하면서 

“한국말도 조금 해요.” 하면서 손가락을 펴 보이기도 하였다.

 

“쥐꼬리 뜻도 알고 김 건모 노래도 알아요.”

 

세상에 이런 일도. 의외로 캐네디언들은 한국 문화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소주에 대하여 물어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눈을 찡긋, 하기도 하였다. 

때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south or north? (남쪽, 북쪽)이라고 묻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남쪽이라고 생각한다. 

가을이 되어 할로윈 데이가 되면 학부모들이 사무실로 초대하곤 한다. 캔디, 초콜릿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나누어주는데 벽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면 여름 내내 골프 친 사진들이다. 다른 주에서 온 어느 사업가 말이 캘거리에 오면 오일 머니(석유 판 돈)가 길거리에도 굴러다닌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할로윈 대이,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어느 해든가. 하루 종일 할로윈 행사를 마치고 많이 피곤하였다. 그즈음 나는 작은 승용차를 전철역에 세워놓고 다운타운까지는 전철을 타고 다녔다. 전철에서 내리면 주차장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위에 올라가서 아침에 주차해놓고 간 자동차를 찾아보면 멀리서도 초록색 차가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 못 생각하였나, 내려가서 다시 찾아봐야지 하면서 주차장까지 가서 찾아보았다. 안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러자 집에 계시던 시어머니 말씀이 내 옷이 없어졌다, 하시는 것이었다. 

집으로 모두 돌아온 다른 가족들도 하나하나 없어진 것들을 발견하였다. 

거실에 놓여있던 컴퓨터와 디브이디 등 그리고 아들 옷이 많이 사라졌다. 안방에는 서랍장등이 열려진 채로 흩어져있었다. 우리가 경찰에 신고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서야 경찰이 도착하였다. 굳은 표정의 경찰관은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하더니 잃어버린 물품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아들의 물품이 제일 많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도둑들은 아마도 아들 나이 정도인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였다. 차고로 나가는 문에는 아들이 아끼던 토끼 인형이 뒤로 벌렁 누운 채 떨어져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급히 도망쳤는지 짐작하였다. 어떻게 들었는지 아는 형님이 급한 발걸음으로 찾아와서 문 앞에 소금을 뿌려주어서 우리는 그나마 아픈 마음을 달래며 잠시 웃기도 하였다. 

경찰들은 몇 시간 동안 소파에 앉아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농담도 하더니 이제 갈 시간이 되었는지 차례로 일어서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경찰 중에 한 명은 한국인이었다. 

‘많이 놀랐지요?“ 하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뒤로 쓰러질 듯이 정말로 많이 놀랐다. 만약에 우리 가족들이 우리끼리 아는 어떤 비밀 대화라도 나누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행이도 우리는 솔직하게 모든 상황을 말하여주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은 아픈 속을 달래며 한국에서 가져온 우황청심환을 먹고 겨우 잠을 청하였다. 

다행히 남편이 하던 사업장에 직원들 월급주려고 찾아다놓았던 현금은 안전하게 그대로 있었다. 얼마 전에 학부모에게 받은 스테이크 집 기프트 카드도 사라졌다. 다음 날 함께 일하는 캐나다 교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캐나다 좋은 나라인 줄 알고 이민 왔는데 이런 일 겪고 보니 캐나다 좋은 나라 아니네.”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고 다음날 출근 한 나에게 교사들이 갹출하여 모았는지 꽤 많은 현금과 스테이크 하우스 상품권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다시 우리는 안고 함께 울었다. 

석유회사 데이케어에 근무하면서 처음에는 아기들을 돌보았지만 몇 년 지난 후에는 프리 스쿨 교사에 응모하였다.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을 해야 한다기에 나는 한국 문화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 가져갔다. 각 센터에서 모인 매니저들이 나의 수업을 함께 참관하면서 합격 여부를 심사하였다. 다행히 한국에서 가져간 멜로디언으로 아리랑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알려주고 한국 음식과 한복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만장일치로 합격하여 프리스쿨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큰 교실에는 세 명의 교사들이 세 그룹으로 나누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캘거리 다운타운에는 캘거리의 첫 역사를 시작하였던 캘거리 포트를 비롯하여 박물관등 역사적인 볼거리가 많고 외곽으로 나가면 버터필드 농장과 콘 메이즈(corn maze) 드럼헬러에 있는 공룡 박물관(Royal Tyrrell Museum) 등 아이들이 견학갈 수 있는 곳이 많았다. 

특별히 공룡 박물관은 한국에서 손님이 오실 때마다 꼭 모시고 가는 명소가 되었다. 마치 주라기 시대 영화를 찍은 배경처럼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기이한 사암들이 마치 버섯 기둥처럼 서 있고 검고 어두운 들판에는 공룡들이 마치 살아서 달려가는 모습을 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박물관 안에는 시대별로 공룡이 살았던 모습의 사진들과 실제로 과학자들이 드럼헬라 현지에서 발굴한 공룡 뼈들을 조각조각 맞추는 장면과 뼈를 맞춘 후에 

공룡의 전체 모습을 전시해 놓은 모습이 정말로 대단하였다. 

매일 일기를 쓰듯이 아이들과의 활동을 적어 나갔고 어느 정도 모아진 것을 교민 신문에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한참 지나자 전철에서 만난 어느 분이 본인은 데이케어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선생님, 발표해주시는 글이 제게는 많이 도움이 되요. 캐나다 전래 동요도 소개해주세요.” 하며 부탁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 전래동요와 우리나라 동요를 비교하는 글을 몇 주 동안 신문사에 보내주었다. 그때부터 글쓰기를 거의 매일 하면서 이민 살이 외로움도 달래고 데이케어에 근무하는 초보자들에게는 정보도 공유하면서 보람된 일을 한다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십여 년 넘게 다운타운 석유 회사 데이케어에서 근무하면서 늘 마이너리티, 소수 민족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교실 벽에는 인종 차별하지말자는 구호를 붙여놓았지만 대부분 캐네디언 백인들이 근무하는 환경에서 나 혼자 일하다보니 때로는 실망하는 날들이 왜 없었을까. 

늘 나 스스로 운영하는 하는 데이케어 비즈니스를 꿈꾸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교실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부 서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호시탐탐 노리는 척후병처럼 주변을 주시하면서 언젠가는 내가 하는 날을 마음속으로 기다렸다. 

인생의 기회는 때로 이상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해고 (fire!) 라는 단말마의 외침으로 나는 어두운 절망의 터널을 걷게 되었다. 늦여름이 가고 초가을이 오는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하지, 사실대로 말해야지. 

그즈음 데이케어에서는 동부 온타리오 쪽에서 새로 온 매니저와 본사의 매니저 간에 파워 게임이 눈에 보이게 일어났고 우리 교실에도 나이 어린 처녀가 낙하산으로 배정되었다. 우리 딸 아이 또래라서 나는 잘 가르쳐준다고 이것저것 알려 주었는데 내가 간섭한다고 느꼈을까. 

나를 무고 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어느 남자아이가 또 발길질을 하기에 그 아이 흉내를 내면서 그러지 말라고 한 것을 내가 아이를 발로 찼다고 한 것이었다. 

매일 동네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캘거리 하늘은 무척이나 높고 푸르다. 가을이 오려는지 짝짓기 하는 고추잠자리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저런 미물들도 가고 오는 때를 잘 알아 다니는데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책을 하기도 하고 그 처녀 아이를 원망도 해보면서 몇 주가 지나갔다. 

라이센싱(licensing) 사무실에서는 전화가 걸려왔다.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걷고 걸으면서 그룹 전체 미팅 하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룹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나올 때마다 그룹 전체 교사들에게 소개하는 미팅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때 데이 홈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교사들에게 알리는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규모가 큰 데이케어는 언제나 자리가 모자라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집에서 작은 규모로 하는 데이홈은 정부에서 지원도 해주는 일종의 틈새시장 같은 것이었다. 

그래, 맞아 하면서 나는 데이홈을 창업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아들이 생활하던 맨 아래층을 비우고 독립하였다. 

데이홈은 데이케어에 비하여 규모가 작아서 마치 가정 같은 분위기를 아이들이 느끼도록 하여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맞벌이 가정이 많아서 일 년 정도 육아 휴가를 마치면 어머니들이 데이케어나 데이 홈에 아이들을 맡긴다. 때로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도 미리 등록하기도 하는데 경쟁이 치열한 곳은 들어가기도 어렵다고 한다. 

우선 대청소를 하면서 가구 배치를 새로 하였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 줄 것은 주고 데이홈에 맞도록 새로 구성을 하였다.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개업 플랭카드를 보내주고 이웃에서는 꽃 그림도 보내주었다. 에이전시에서는 주정부와 데이홈을 연결해서 주정부 기금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제일 처음으로 왔던 아이 이름은 찰리,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은 점점 늘어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아이들이 생길 정도로 커졌다. 형에 이어 동생이 오기도하고 옆집 소개로 따라오기도 하였다. 

데이홈을 시작한 지도 어느 덧 십 년이 되었다. 

2001년에 이민 와서 십 여 년 근무하던 다운타운 석유회사 데이케어에서 배운 많은 것들을 활용해보고 더 좋은 점은 캐나다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전하는 일이다. 한국 유치원에서 근무할 때 아이들에게 지도하던 사물놀이, 다도 교실 등을 이곳 아이들도 좋아한다. 

꽹과리, 북, 장구, 징 등을 두드려보면서 신기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찻잔에 물을 따르면서 티파티라고 마시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특히 아이들은 소고를 좋아한다. 작아서 두드리기에 편한 지 자주 소고놀이를 하면서 작은 별 동요를 반짝 반짝(twinkle twinkle)하면서 고사리 손을 흔들며 부르는 모습이 작은 천사들 같다. 

이제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려한다. 

우리가 캘거리에 도착한 주말은 캐네디언들이 훼미리 데이라고 부르는 가족의 날이었다. 금요일 밤중에 도착하여 일요일까지 집에 머무르다가 월요일 아침 두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 가톨릭 학교에 가서 등록을 하였다. 

ESL 교실에는 한 달 전에 왔다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때 얼마나 부러운 마음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던지 

중 3, 중 1학년이었던 우리 아이들이 과연 이곳에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큰 아이는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미국 운송회사 캘거리 지사에 근무하고 작은 아이는 통신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남편은 건강식품 사업을 하면서 로키 산행을 즐긴다. 

어느 덧 이민 살이 이십 년, 돌아보면 시간은 참으로 빨리 지나갔다. 지난 가을 출판 기념회 할 때 친구가 사온 양난에서는 뿌리골무가 제법 많이 올라왔다. 뿌리에 수분이 부족하면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빨아들여서라도 성장한다는 난을 바라보면 친정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이민 짐을 차에 다 싣고 텅 빈 마루에 앉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이민 짐 다 부쳤어요.”

 

“설마, 설마 하였는데 정말 가는구나.” 하시면서 울음을 참으시는 듯 꺽꺽,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때의 아픈 마음을 나는 뿌리골무라는 제목의 시로 써보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이민 오기 전에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면 영어만 사용하면서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캐나다 정부는 모자이크 문화로 각각의 나라에서 온 소수민족들에게 그 나라 고유의 문화를 지키도록 정책 지원을 해준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인들이 모여서 한인 축제를 즐기기도 하고 특별히 노인들에게는 더 많은 지원을 해준 다. 

우리가 이민 오던 그 다음 해 미국 둘째 아들집에 거주하시던 시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 그때부터 영주권을 추진하고 또 시민권까지의 절차를 마치고 만 십년이 지나자 노인 연금이 나오고 노인 아파트에 가실 수 있게 되었다. 

“효자가 따로 있나.” 매달 마지막 날 정확하게 입금되는 연금을 보면서 어머니가 노래처럼 하시는 말씀이다. 어머니는 노인회에서 운영하는 사물놀이반과 합창단에 출석하시면서 노후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신다. 

남편이 처음에 캐나다로 이민 가자고 하였을 때 두 가지 문제로 고민하였었다. 어떻게 해서 그 달러라는 것을 벌어야하는지, 또 다른 하나는 이제 한국을 떠나가면 그동안 말하고 쓰고 하던 아름다운 모국어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될 텐데 하는 마음이 들어 친정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만큼 아쉬움이 컸었다. 다행히 캘거리에는 한인문인들의 모임이 있어서 함께 모여서 한국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모국어의 소중함을 나눌 수 있었다. 

로키 근처에 살면서 자주 산을 바라보면 중학교 때 배운 노래가 떠오른다. 

로키 산에 봄이 오면 나는 돌아가리라, 라고 노래 부르던 그 시절 내가 로키 근처에서 살게 될 줄 꿈에나 생각하였을까. 외로운 이민 살이 하면서 가끔 글 쓰는 일로 위로 받을 때 생각하곤 하였다. 만약에 내가 수필집을 내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 제목은 -로키에 봄이 오면-으로 하리라. 

그 꿈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수필집 -로키에 봄이 오면-을 다시 펼쳐보면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지만 더 나은 꿈의 로키를 바라보며 저 웅장한 자연을 닮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 로키 산행을 갈 때마다 메모해서 모은 작은 시편 조각들로 시집도 출판하였다. 

해설을 써주신 천융희 시인은 작은 기쁨을 즐기는 휘게(hygge)-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덴마크어-의 일상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제 2021년 새봄이 왔다.

 

 

 

♣신금재 작가 

서울 출생 

2001년 캐나다 이민 

[시집] 내 안의 아이,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전자시집] 사슴의 법칙 

캘거리 디카시연구소

캐나다 디카SEE

캘거리 문협, 캐나다 여류문협, 서울디카시인협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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