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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생이 / 조범진

유세영 기자 | 기사입력 2021/05/28 [19:18]

좀생이 / 조범진

유세영 기자 | 입력 : 2021/05/28 [19:18]

 좀생이 / 조범진

 

쾅!

 

“자네 지금 이걸 계획서라 쓴 거야?!”

 

책상을 향한 부장의 주먹질과 거침없는 일갈에 사 내부에는 쥐 죽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꿀 먹은 벙어리 아닌 고개는 아무런 대꾸도 못 한 채 머리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대고 있을 뿐이다.

 

“거 참 대학원까지 나온 친구가 말이야. 이게 무슨 애들 수학여행 보고선 줄 알아?! 시간을 그만큼이나 줬는데 도대체 뭐한 거야! 다시 작성해와! 모레까지야! 알았어?”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부장은 서류 물을 박박 구겨서 내 앞으로 던졌다. 넝마 조각이 된 계획서를 받아든 내가 힘없이 자리로 돌아가 의자를 잡아끌고 엉덩이를 내려놓자 직원들의 불편한 시선과 웅성거림을 시작으로 숨 막혔던 정적이 깨지며 멈추었던 사무실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로 벌써 6번째인가?

 

나라는 인간 자체가 싫지 않고서야 나올 수가 없는 행동이다. 아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거금의 수고료까지 내가며 모 기업의 임원 나리와 컨설턴트의 칭찬 일색까지 받아내었던 계획서인데 제까짓 게 뭐라고 이리 딴지를 거는지…. 동작이 굼뜨다느니 셔츠 다림질이 넥타이 색이 어쩌니 한창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나 해대고 만년 부장으로 썩어가는 것이 마치 내 탓인 것처럼 사사건건 갈구어 대는 좀생이 같은 저 부장에게 비위 맞추기나 술자리 선물 따위가 효과가 있을까? 공원 한복판에서 얼큰하게 취한 채로 주먹다짐이나 몇 번 하면 조금 진전이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워낙 좀생이니 더 많이 맞아줘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8시가 넘어서 퇴근길에 올랐다. 요 몇 달에 걸친 12시 퇴근의 빈도수를 생각해 보자면 칼퇴근이나 다름없는 시간이다. 샛강다리를 지나가던 도중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래로 보이는 생태공원으로 시선을 옮긴 후 팔십 먹은 노인네 앓는 소리와 함께 양팔을 난간에 기댄 채 입사 후 지나온 날들을 회상해 보았다.

 

쳇바퀴 같은 반복, 밥 먹고 넥타이 매고 출근, 회사의 생명이라는 안락하고 가족 같은 근무환경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위에서는 쪼고 아래서는 개기는 일상의 연속, 예금보다 세금이 더 좋아하는 월급날만 바라보며 꾸역꾸역 연명하는 허수아비 같은 인생. 그 옛날 먹여주고 재워줬던 군대가 그리울 정도니 아무래도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아아 지친다. 기회만 된다면 어디론가 멀리 좀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나 왔어.”

 

밤바람에 파묻힌 왜가리와 나뭇잎을 관중으로 한 우울한 독백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내 목소리를 들은 와이프 수민이가 밝은 표정으로 마중 나와 옷가지와 가방을 받아 주었다. 소파 위에 그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고 저녁 먹고 온다는 연락 받았잖으냐는 내 말에는 웃으며 목욕부터 하고 오라는 말로 일축하였다.

 

개운하게 목욕을 끝내고 거실로 들어섰더니 이게 웬걸, 작은 케이크 하나를 중심으로 붉은 와인과 함께 약간의 안주를 곁들인 정성스러운 반상이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수민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생일이잖아.”

 

생일이라, 오늘이었던가? 작년에는 뭐 했었지? 아, 동창회 한답시고 밖에서 술 먹는 바람에 지나쳤었군. 수민이 생일은 우정을 쌓는답시고 팽개쳤었고…. 결혼기념일을 같이 보낸 지는 또 언제였더라…. 하하.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과 케이크에 초를 붙이는 손동작은 어딘지 모르게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조금씩 들썩거리며 멋쩍은 웃음만 짓고 있는 나에게 수민이가 알록달록한 종이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 늘 언제나 감사합니다.’

 

5살 난 수연이가 손수 쓴 축하카드였다. 어린이집에서 써서 가지고 온 것이라 하였다. 틀린 맞춤법을 교정받은 자국과 삐뚤삐뚤한 글씨 꼴을 보니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끼적거리며 눌러쓴 모습이 눈에 훤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멍하니 앉은 채로 편지를 쓰는 딸애의 모습을 상상하는 내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뭉클하며 점점 북받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찌릿한 무언가가 가슴속을 사선으로 훑어내며 지나갔다. 전율 섞인 감정이 뜨거운 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흐느끼기 시작했고 잠시 당황했던 수민이는 곧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감싸 안아 주었다. 착하고 고마운 수민이. 거래처에서 채인 화풀이를, 아무런 재미도 없는 부장과의 일화나 말아먹은 프로젝트의 화풀이를 항상 묵묵히 받아 주었던 수민이. 남자라는 생물 특유의 생존본능으로 인한 투박함과 무심함에 받았을 상처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수민이. 다 집어치우고 어디로 떠나가고 싶다고? 여성에게서만 취할 수 있는 장점을 당연한 권리인 마냥 실컷 누려 놓고 지금 와서 군대가 그립다고? 부장이 날 싫어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바로 좀생이 중의 좀생이가 아니었던가. 회사에서는 좀생이들끼리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군. 관계 개선의 길이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한 것은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케이크에 꽂혀있는 촛불을 불어 끄고 잔을 들어 올렸다. 달콤한 와인 한 모금에 취기가 기분 좋게 피어올랐고 웃음과 버무려진 조촐한 파티는 계속해서 무르익어 갔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며 살랑거리는 것처럼 온실 속의 식물이 온기를 머금고 아늑하게 자라나는 것처럼 나는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그 날 자정이 지나기 전까지 방안에 떠 오른 수민이의 미소를 한껏 독차지하고 있었다.

 

 

 

♣ 조범진 작가

(사) 한무리 창조문인협회 수필가 등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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